<하녀>(김기영, 1960)에는 동시대 한국영화에 없는 남다른 점이 있다. 이름이 없는 ‘하녀’는 단순하게 파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펀지처럼 주변의 욕망을 빨아들이는 산업화의 괴물이 돼간다는 것이다.
김기영의 <하녀>(1960)는 영상자료원의 복원 과정을 거쳐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한국영화사의 대표 작품이다. 처음 이 영화를 접한 것은 오래된 필름을 통해서였지만 복원된 <하녀>(리마스터링된 DVD)를 볼 때마다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놀라게 된다. 복원된 흑백 화면은 서구의 필름 시대 감독들처럼 심도 있는 공간(딥 포커스)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래층과 위층 사이를 잇는 계단, 베란다 창문과 문틈을 통해 새로 지은 양옥집(요즘은 잘 안 쓰는 표현이 되었지만)에 가득 차 있는 욕망을 지켜보게 만든다.
쉼 없이 돌아가는 안주인(주증녀)의 재봉틀 소리, 가부장 동식(김진규)의 피아노 교습 연주, 아이들이 속삭이는 소리, 새 집에 들락거리는 쥐들이 내는 소리. 이 영화는 이층 양옥집을 채우는 욕망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모든 소리에 반응하고, 끝내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인물인 ‘하녀’(이은심)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녀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녀에게 가족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상경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동식의 아이를 임신한 하녀에게는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등장하는 첫 장면은 뒷모습이다. 여직공들 사이로 지나가는 하녀의 뒷모습.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가려진 존재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음악을 가르치는 동식을 연모하던 여직공이 자살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다른 여직공들은 분노를 터트린다. 그러나 그녀들 사이에서 하녀의 감정이나 분노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존재감 없는 여자가 동식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그것도 동식을 연모하는 또 다른 여직공인 ‘미스 김’(엄앵란)의 소개로 들어간 것이었고, 하녀는 미스 김을 흉내 내듯 행동하기 시작한다. 동식을 사모하는 미스 김처럼 하녀 역시 동식을 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녀가 보여주는 욕망의 드라마는 특별해 보인다. 동식의 아내는 집을 유지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재봉틀을 돌리고, 동식은 자신을 흠모하는 여성들 사이를 오가며 남성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녀의 욕망은 자신의 필요에 기인하지 않는다. 다른 여자들이 동식을 원하면 자신도 원하고, 담배를 피우는 동식을 보면 하녀도 흡연을 하고 싶다. 하녀의 욕망은 무차별적인 모방 욕망이다.
이 욕망의 본질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 이후 안정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1960년대 초입 한국 사회를 채우던 욕망을 닮았다. 피아노로 대변되는 서구 문화를 욕망하고, 양옥집으로 대변되는 중산층의 부를 욕망하고, 재봉틀을 돌리면서도 집안일을 거들 하녀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당대의 욕망을 생각하게 한다. 1960년대의 욕망을 문학 언어로 다룬 작가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이 1960년대 들어서 한국 사회가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돌출되는 배금주의, 출세주의, 도시 지향성을 인물을 통해 묘사한 것처럼, <하녀> 역시 시골에서 상경하는 사람들과, 이층 양옥집과 하녀가 필요한 시대의 욕망을 녹여내고 있다. 그것은 중산층 가정의 붕괴로 이어진다.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은 욕망을 품은 인물들이 붕괴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인데, 소설의 초반부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너무나 근대적인)에서 아내가 될 탤런트를 만나고, 운명적 사랑을 예감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한다. 하지만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로 인해 끝내 이혼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새로운 문화의 충동을 김승옥이 집약하고 있다면, 김기영 역시 <하녀>로 시작해 <화녀> (1971), <충녀>(1972) 등으로 영화를 변주하면서 가부장과 하녀가 만나 끝내 파멸해버리는 멜로드라마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런 점에서 두 작가는 닮아 있다.
그런데 김기영의 <하녀>에는 김승옥 작가나 동시대 한국영화에는 없는 남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욕망의 몰락이 아니라 욕망의 극한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인 ‘가오나시’처럼 하녀의 욕망에는 멈춤이 없다. 결국 괴물이 된 하녀를 상대하는 동식도, 동식의 아내도 힘과 재력으로 하녀를 상대하다가 파멸해버린다. 이처럼 과잉의 에너지는 김기영의 미장센과 클로즈업을 통해 극단적인 심리의 드라마로 변모하면서 죽음과 공포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동시대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산이다. 김기영 감독은 이 과잉의 극한 결말을 마무리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하나 집어넣었다. 좀 뜬금없어 보이는 에필로그는 하녀가 벌인 일련의 사건이 신문 기사의 내용이라고, 마치 영화의 내용이 한 여름 밤의 꿈인 것처럼 처리해버린다. 이것은 일종의 안전장치일 것이다. 하녀를 괴물로 남겨두었을 때 현실에 존재하는 불안감을 희화하려는 전략이다. 하녀가 집안을 파멸로 몰고가는 것은 가십 기사의 한 페이지일 따름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시대적 욕망의 불안을 비켜간다. 그래서일까. 이 장면은 뜬금없기보다는 씁쓸하고 냉혹하다. 1960년대에 피어난 이 욕망의 자화상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드리워 있는 진짜 얼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