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임원식 감독(오른쪽)과 필자(1999)
시신을 기증하고 떠나다
그에게 결단은 곧 실천이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마음을 굳히면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만큼 승부욕이 강했다. 타향인 제주를 고향보다 더 사랑하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일을 접지 못한 사람, 바로 임원식 감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공적인 일로,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2003~2013) 재임 중 추진했던 수중촬영장 개설 계획이 무산된 점과 4?3사건을 다룬 현기영 원작 <순이 삼촌>을 영화로 만들지 못한 사적인 일이다. 그는 이를 두고 여러 차례 아쉬워했다.
그는 5년 전부터 경동맥협착증으로 고생하면서도 1997년부터 추진해온 <순이 삼촌>의 시나리오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처지임에도 오히려 후배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영화단체의 분열을 걱정했다. 그런데 약물 후유증이 노쇠현상과 겹쳐 악화되면서 지난 9월18일 오전 10시 9분 제주대학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 그의 시신은 본인의 뜻에 따라 병원에 기증되었다.
임원식 감독과 나는 고등학교 선후배의 관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 2년 선배이다. 이 학교는 박철희(문학평론가), 문충성(시인), 현기영(작가) 등과 같은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임 감독은 2회, 나는 4회 졸업생이다. 아직도 그 시절 당당했던 총학생회장 임원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교생이 모인 조례시간에 어깨가 딱 벌어진 당당한 체구로 연단을 향해 구령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그는 학생회장 선출 당시 제주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일부 여론을 물리치고 특유의 고집과 배짱으로 학생들을 휘어잡았다. 이 시절 그는 고등학생으로서는 이례적인 염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교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소문이 난 이 연애의 상대는 제주여고 2학년생인 삼성여관집 맏딸 고병희였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의 언니이기도 했다. 그녀의 동생을 좋아한 친구를 따라 그 여관집 주변을 맴돌던 기억이 새롭다. 임 감독은 고등학교를 마친 지 얼마 안 돼 고 씨와 결혼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
일 만들기 좋아한 열정의 카리스마
임원식 감독은 지금까지 1935년 1월 22일생으로 알려져왔으나 이는 호적상의 기록으로 실제 출생년은 1932년이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해방이 되던 해 12월 성탄절 무렵 지주로 몰린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서울 휘문중학에 다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피란을 와 오현고등학교에 편입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한때 기독교방송 성우로 활동하다가 1959년 재일동포 유진식(劉振植) 감독의 <불멸의 성좌> 제3조감독이 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김수용 감독의 <돌아온 사나이>(1960)의 제작팀에 합류하고, 이를 계기로 신필름 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 밑에서 연출 일을 돕다가 1965년 나봉한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다룬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최은희 주연)를 감독 신고작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2시간 40분이나 되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이렇게 영화계에 진출한 임 감독은 김승호, 최은희 주연의 <대폭군>(1966)을 비롯한 <석양에 떠나가다>(1969), <대감신랑>(1971), <아리랑>(1974), <어머니>(1976)와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 등 모두 38편을 내놓았다. 이 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와 무능한 상이군인인 남편과 전처 소생의 오남매를 돌보며 낙후한 마을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데 앞장선 여성의 이야기 <어머니>(1976, 제15회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참배 정책에 맞서 싸우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저 높은 곳을 향하여>(신영균 주연)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기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운수업계의 ‘삥땅사례’를 소재로 삼은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1981년, 태창흥업 제작, 유지인·이영옥·금보라 출연)가 그해 12월 10일 전국자동차연맹의 압력으로 상영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운전기사와 버스 안내양의 관계를 불미스럽게 그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직을 맡고 있던 나는 이영일 회장과 협의해 창작·표현의 자유를 우려한 영화평론가들의 의지를 담아 ‘<도시로 간 처녀> 상영 정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작성해 각 언론사에 보냈다. 이 영화의 제작자가 바로 임원식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제도적인 검열이 아닌 사회단체의 압력에 의해 제동이 걸린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열정이 넘친 의욕으로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 초대 이사장(2000)을 지내는 동안 「한국영화감독사전」(2004, 국학자료원)을 발간하는 업적을 세웠다. 이때 나는 그의 부탁을 받아 집필진을 구성하고 출간을 도왔다. 그 뒤 사단법인 제주영상위원회 부위원장 겸 운영위원장(2003)직을 역임했는데, 그의 재임 중에 나는 그의 요청으로 「제주영화사」를 집필했다. 이렇게 나는 임원식 감독과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다.
일을 만들기 좋아한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이 모두 영화감독이 되었는데, 장남 종호는 <
짬뽕 홍길동>(1990)으로, 차남 종재는 <
그들만의 세상>(1996)을 통해 데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