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따라 인간의 심장박동과 들숨, 날숨의 속도는 달라진다. 그 리듬이 부자연스러우면 몸에 무리가 오는 것처럼, 영화도 리듬을 잃으면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영화의 피와 뼈와 살을 창조하는 것은 감독과 배우지만, 영화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관장하는 건 편집기사의 몫이다. 편집 부분의 기라성 같은 ‘신의 손’ 중에서도 ‘박곡지’라는 이름은 독보적인 브랜드다.
박곡지 편집기사가 영화계에 처음 발 디딘 곳은 편집실이 아닌 촬영 현장이다. 1987년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연출자로서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1987), <연산일기>(1988)의 연출부 스크립터로 합류했다가 편집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표현대로 “토막토막 끊긴 필름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고, 거기에 감정과 리듬을 담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편집 작업에 매료된 그는 1988년부터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작업하던 박순덕 편집기사의 1조수로 편집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스승 밑에서 10년 가까이 경험을 쌓은 뒤에야 독립할 수 있는 도제 시스템이 일반적이었지만, 박곡지 편집기사가 이름을 떨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불과 스물여섯 살에 영화인협회 인준을 받은 ‘최연소 편집기사’로 주목받으며 <비처럼 음악처럼>(안재석, 1992)으로 데뷔했고, 1994년 ‘박곡지편집실’을 차려 독립하자마자 첫 작품 <손톱> (김성홍)으로 3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기술상을 받으며 ‘박곡지 시대’가 열렸다.
한국영화가 양적, 질적으로 폭발적 성장을 일궈낸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150여 편의 영화에 새겨진 ‘편집 박곡지’라는 타이틀은 ‘완성도 보증수표’와 다름없다.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1996)와 <쉬리>(1999) 등 한국 블록버스터의 뿌리가 된 작품부터,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1997) 등 한국 영화의 새물결을 일으킨 감독들의 초기작, 송능한 감독의 <넘버 3>(1997), 장윤현 감독의 <접속>(1997) 등 흥행 장르영화가 모두 박곡지 편집기사의 손을 거쳐 숨결을 얻었다. 이후로도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2009), 변영주 감독의 <화차> (2011), 대종상과 황금촬영상 편집상을 받은 <판도라>(2016)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쉼 없이 확장되고 있다.
이 중 몇 편의 대표작을 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국영화사의 큰 족적을 꾹꾹 눌러 담아왔다. 무려 25년간 변화하는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작가주의 예술영화부터 멜로, 호러, 스릴러, 액션에 이르는 대중 장르영화까지, ‘영화의 모든 스펙트럼’을 품어온 자체가 대체 불가능한 박곡지 편집기사의 저력을 입증한다. 또한 여전히 여성 전문 스태프가 흔치 않은 한국영화계에서 박곡지 편집기사가 걸어온 길은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게 크고 흔들림 없는 이정표가 돼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