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화인 열전 2: 촬영감독 엄혜정 금녀의 벽을 뚫고 끈기 있게 나아가다

by.장성란(영화 저널리스트) 2019-01-04조회 5,894
엄혜정 감독

영화제작 현장에서도 특히 촬영은 여성을 찾아보기 힘든 분야로 통한다. 그건 비단 충무로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3월 열린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치욕의 대지 Mudbound> (디 리스, 2017)의 레이철 모리슨이 여성 최초로 이 시상식의 촬영상 후보에 오른 것만 봐도 그렇다. <해빙>(이수연, 2017)의 카메라를 잡은 엄혜정 촬영감독을 기억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한국영화계에서 이른바 ‘상업영화’의 카메라를 잡은 몇 안 되는 여성 촬영감독이기 때문이다. 1996년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영화 잡지에서 본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입학생 모집 공고가 그를 영화제작 현장으로 이끌었다. 촬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한예종 영상원 예술사 재학 시절, 영사기에 끼운 필름이 ‘촤르르’ 돌아가는 소리에 반하면서부터. 예술사 과정을 마치고 영화제작 현장에 나가 촬영팀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으려 했지만, ‘금녀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렇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미셸 공드리, 2004)을 찍은 엘렌 쿠라스 등 해외 여성 촬영감독의 존재가 힘이 됐다. 2004년, 단편 <핑거프린트>(조규옥, 2004)로 3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최초로 촬영상을 받았고, 그해 단편 <즐거운 우리집>(엄혜정, 2004)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뒤, 한예종의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예술전문사 과정도 수료했다. 그가 촬영감독을 꿈꾸는 여성 영화인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자기 자신을 믿고 끈기 있게 열심히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첫 장편 촬영작인 <해빙>은 그간 여러 단편에서 호흡을 맞춘 이수연 감독의 작품. 엄혜정 촬영감독은 이 경험으로 얻은 가장 큰 자신감이 “‘다음 장편도 찍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연쇄 살인에 얽히는 승훈(조진웅)의 이야기를 쫓는 이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시점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달리 드러나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한 화면 안의 명암을 강조했다. 시점에 따라 인물의 그림자를 더 진하게 드리운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다. “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찍어도, 관객이 영화를 볼 때 더없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촬영을 목표로 한다”는 그의 다음 영화를 충무로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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