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김영희(1924~)
김영희는 한국영화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다. 1943년, 형부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소개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현상실에 취직, 곧 편집기사 양주남의 조수로 일했다. <조선해협>(박기채, 1943)으로 네거티브 필름 편집을 시작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 상남 미공보원(USIS), 해군 교재창에서 수백여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면서 편집 전문 인력으로 1970년 즈음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규환의 <춘향전>(1955)을 편집해 충무로와 인연을 맺었고, 전후 서울의 영화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만흥의 <구원의 정화> (1956) 편집을 담당하며 극영화에 본격 투신했다. 1958년부터는 신필름 편집실에 있으면서 신상옥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지옥화>(1958), <동심초>(1959) 등을 편집했고, 1962년부터는 충무로 살림집에 개인 편집실을 차렸다.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고,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5)도 그녀가 편집했다. 1970년 영화계를 떠날 때까지 120여 편을 편집했다.
편집 이경자(1932~2010)
이경자는 감독 최진의 소개로 <애정파도>(문화성, 1956)에서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해 이후 유현목, 조긍하, 이만희, 김소동, 임원직, 박상호 감독의 영화에서 전문 스크립터로 일했다. 김영희가 여성 편집기사로 활약하면서 1960년대 여러 편집기사(양성란, 박양자, 우갑순)가 등장했는데, 1962년 편집에 입문한 이경자는 가장 오랫동안 현역으로 맹활약한 여성 편집기사였다. 신필름 편집실 견습생으로 들어가 <쌍검무> (최인현, 1963)를 시작으로 1965년까지 전속기사로 일했다. 이경자편집실을 내고 임원직, 유현목, 최영철의 작품을 주로 편집했다. <수선화>(최훈, 1973), <호국 팔만대장경>(장일호, 1978)으로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한 바 있고, 또 영화진흥공사에 새로 들여온 스틴벡을 사용해 동시녹음 작품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1983)를 편집해 같은 해 대종상 편집상을 받았다. 그녀는 가위로 필름을 잘라 아세톤으로 붙이는 편집부터 시작해 <파라다이스 빌라>(박종원, 2000)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비선형 편집까지 해낸, 한국영화 편집기술사의 주요 인물이다. <아리랑>(이두용, 2002)을 마지막으로 40년간 작업한 작품은 400여 편에 달한다. 그녀는 이경숙, 박정자, 양수미, 김명화, 차옥진, 신민경 등 여성 편집조수를 두었는데, 이들은 이후 편집기사로 독립해 활동했다.
의상 이해윤 (1925~)
50여 년간 재봉틀 앞에서 금관조복을 만든 이해윤은 한국 최초로 영화의상을 전문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녀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규환의 조감독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면서였다. <춘향전>과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 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그녀는 이들 영화에서 만난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도움에 힘입어 <단종애사>(전창근, 1956)를 시작으로 영화의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주로 사극을 비롯한 시대물과 군사전쟁물을 맡았다. 컬러 시네마스코프 경작으로 유명했던 <성춘향>(신상옥, 1961)과 <춘향전>(홍성기, 1961)을 모두 담당하기도 했고, <토지>(김수용, 1974)나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는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내?외면을 표현했다. 인민군 의상을 멋지게 만들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한 아픔을 겪은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 베트남 현지 촬영 중에 의상을 만들어야 했던 <하얀 전쟁>(정지영, 1992)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물론 엑스트라 수백 명의 의상도 도맡아 만들었다. 1996년 <애니깽>(김호선)으로 은퇴, 그녀에게 물려받은 2만여 벌의 의상으로 아들 권유진 역시 의상감독으로 활약한다. 1980년경 창립한 영희회(映嬉會)는 현장 여성 영화인의 권익과 재교육을 위해 이해윤이 주도적으로 만든 단체다.
프로듀서 전옥숙 (1929~2015)
전옥숙은 한국 최초의 여성 프로듀서다. 1960년 영화평론지 「주간영화」의 발행인으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1964년 남편 홍의선과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를 설립 <부부전쟁>(정창화, 1964)을 창립작으로 내놓았다. 그녀는 대지 2,000평에 최신 설비의 스튜디오 두 개를 갖춘 답십리촬영소도 운영한 최초의 여성 촬영소장이기도 했다. 차기작 <추풍령>(전범성, 1965)을 샌프란시스코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하며 능력 있는 제작자로 충무로의 이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한센인 남편을 따라 소록도에 들어가 생활한 김숙향의 실화를 영화화해 원안, 각본, 제작을 여성이 담당했다 하여 ‘여성들이 만든 여성영화’로 불린 <그대 옆에 가련다>(엄심호, 1966)를 내놓아 지상의 주목을 받았다. 전범성, 김수용, 이만희, 강대진, 임권택 감독과 함께 1969년까지 작품성 있는 29편의 영화를 기획·제작했다. 1970년대 언론사 ‘후지산케이’의 한국지사장을 지냈고, 1984년에는 국내 최초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인 ‘시네텔 서울’을 설립,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내용을 증언한 내용을 담은 30분짜리 다큐멘터리 <나의 전쟁범죄 고백>을 창사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KBS TV문학관>에 단막 드라마를 제작해 납품했다. 감독 홍상수가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