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서울여성영화제 개최 기자회견. (왼쪽부터) 김현숙, 변재란, 집행위원장 이혜경, 유지나
서른 살 여자 강정자는 재수생, 동네 백수, 노인들로 채워진 동시상영관의 매표직원으로 일한다. 한가하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얼굴을 모르는 맞선남이 극장을 방문하기로 돼 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극장 앞을 지나가고 정자는 갑자기 그를 뒤쫓는다. 그러나 남자도 놓치고 갑자기 내린 비에 흠뻑 젖은 정자는 극장 앞에서 비에 젖은 가발을 털고 있는 다른 남자를 발견한다.
임순례라는 특별한 여성 감독의 등장
위의 영화 <우중산책>(임순례, 1994)에서 일상을 벗어난 설렘 속에서 극장 문을 뛰쳐나가던 주인공 정자는 여러모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영화관에서 그저 그런 할리우드 B급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정자는 자신의 마음을 쫓아 극장 밖으로 나가며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머지않아 기대는 약간의 좌절과 일상의 복귀로 끝나지만 말이다. <우중산책>은 원래 영화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13분 분량의 이 단편은 1994년 당시 전국의 재능 있는 수많은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을 벌인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영화제라는 새로운 플랫폼은 기존의 도제 제도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지닌 신진 영화인이 등장하는 주요한 장이 되었다. 남성 주변인이 모여드는 도시 변두리 삼류 극장에서조차 주변인인 한 여성의 마음 풍경을 세심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그려낸 <우중산책>의 임순례 감독은 이후 역시 주변인들의 삶에 주목한 <세 친구>(1996)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감독하며,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정향, 김기덕, 김지운, 허진호 등과 더불어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신진 여성 감독들의 출현
임순례 감독이 열어젖힌 새로운 영화적 풍경은 또 있었다. 그건 그 자신을 비롯한 신진 여성 감독들의 주목할 만한 등장이었다. 장편 극영화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영화사에서 임순례 감독이 등장하기 전까지 여성 감독은 첫 여성 감독 박남옥을 비롯해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까지 단 5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순례 감독의 등장 직후 프랑스문화원과 문화학교 서울을 다니며 영화의 꿈을 키우던, 혹은 1990년대 중반 신설되거나 업그레이드된 국내 전문 영화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거나, 또는 유학에서 돌아온 여성들이 한국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1998)과 <집으로…>(2002)의 이정향,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정재은, <밀애>(2002)의 변영주, <질투는 나의 힘>(2002)의 박찬옥, <버스, 정류장>(2002)의 이미연,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2002)의 모지은, <4인용 식탁>(2003)의 이수연, <...ing>(2003)의 이언희 등 여성 감독들은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탐색했을 뿐만 아니라 장르 자체를 새롭게 만들고 기존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입체적이고 복잡한 여성 캐릭터를 소개했다. 흥행 면에서도 <집으로…>는 개봉 당시 흥행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감독들의 활약에 힘입어 비평, 담론,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활동이 조직되었다. 1997년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만들어져 여성영화를 찾는 여성 관객을 가시화하고 ‘아시아단편경쟁’을 통해 여성 감독을 발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2000년에는 여성영화인모임이 결성되어 현장 여성 영화인들의 네트워크, 교육, 그리고 「여성영화인사전」(소도) 출판과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2001) 제작을 통해 여성 영화인의 역사 쓰기에 힘썼다.
여성 프로듀서의 활약, 여성 중심 서사의 발전
이 시기는 감독뿐만 아니라 여성 프로듀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기도 했다. 사실상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것은 여성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기획에서 시나리오 선택, 감독과 배우 등 적절한 인력의 확보, 예산과 현장 관리까지 책임지는 전문적인 프로듀서 제도가 도입된 때였다. 이는 제도의 혁신을 통해 영화계의 기존 남성 중심 인맥이 어느 정도 약화될 때야 여성들이 온전히 실력으로 영화산업에 진입하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음을 뜻한다. 광고, 기획, 마케팅에서 일하다 1990년대 초중반 프로듀서로 데뷔한 3인 오정완, 심재명, 김미희는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세 사람은 모두 개별 영화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다 영화사 대표로 변신해 제작에 힘써오고 있다(이하 영화 목록은 프로듀서와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 모두 포함). 늘 영화계의 트렌드세터로서 참신한 기획을 보여준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는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1996), <정사>(이재용, 1998), <반칙왕> (김지운, 2000), <눈물>(임상수, 2000), <장화, 홍련>(김지운, 2002),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2003), <4인용 식탁>(이수연, 2003), <너는 내 운명>(박진표, 205), <해변의 여인>(홍상수, 2006), <멋진 하루>(이윤기, 2008) 등을 내놓았고, 작품성과 대중성, 시대적 의미와 오락성의 절묘한 균형 감각을 보여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그 여자, 그 남자>(김의석, 1993), <코르셋>(정병각, 1996), <접속>(장윤현, 1997),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 <버스, 정류장>(이미연, 2001),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 2001), <YMCA 야구단> (김현석, 2002),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2),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2002), <그때 그사람들>(임상수, 2005), <광식이 동생 광태>(김현석, 2005),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임순례, 2007, 이하 <우생순>), <마당을 나온 암탉>(오성윤, 2011), <건축학개론>(이용주, 2012), <화장>(임권택, 2014), <카트>(부지영, 2014),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등을 만들었다. 대중적인 흥행 코드를 기가 막히게 맞추던 ‘좋은 영화사’의 김미희 대표는 <마누라 죽이기>(강우석, 1994), <투캅스 3>(김상진, 1998),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강우석, 1998), <주유소습격사건>(김상진, 1999), <신라의 달밤>(김상진, 2001), <밀애>(변영주, 2002),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발레교습소>(변영주, 2004), <혈의 누>(김대승, 2005), <올드미스 다이어리>(김석윤, 2006), <천하장사 마돈나>(이해준?이해영, 2006), <달콤, 살벌한 연인>(손재곤, 2006), <타짜>(최동훈, 2006), <이장과 군수>(장규성, 2007), <어깨너머의 연인>(이언희, 2007) 등을 만들었다.
호주, 영국, 미국 등의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 분석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영화산업의 양성평등을 이루려면 창작 과정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는 직종의 성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여성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필수적으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갖거나 여성 주도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통계적으로 여성 감독과 여성 스태프를 기용하고 여성 주연의 서사를 기획?개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프로듀서와 감독을 봐도 여성 프로듀서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영화산업 내에서 여성 감독과 일하고 여성 주연의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영화산업 진입과 그들의 시각, 그리고 재능은 남성 중심의 천편일률적인 영화 문화를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한국 영화산업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높여준다.
신수원 감독
재능 있는 여성 감독의 출현, 하지만 남성 중심 네트워크의 재강화
2005~2016년 호황을 맞은 한국 영화산업의 영향 속에서 2000년대 중후반 <오로라 공주>(방은진, 2005), <두 번째 사랑>(김진아, 2007), <열세 살 수아>(김희정, 2007), <궁녀>(김미정, 2007), <6년째 연애 중>(박현진, 2007), <동거, 동락>(김태희, 2007), <미쓰 홍당무>(이경미, 2008),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부지영, 2009), <키친>(홍지영, 2009) 등이 제작되긴 했지만 여전히 여성 감독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문제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지 약 10년이 지나면서 한국 영화산업 환경이 점점 더 경쟁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편된 대기업과 금융자본은 규모를 키워 리스크를 높이고, 스크린쿼터는 축소되고, 제작-배급-극장의 수직계열화가 심화되었으며 그 사이에 남성 중심 네트워크는 재강화되었다. 영화 시장은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와 저예산 독립영화로 양극화되고 대중성을 견지하면서도 장르, 서사, 인력 구성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던 중간 규모 시장이 점점 사라져갔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대규모 수익을 내려는 천편일률적인 기획이 주를 이루면서 ‘브로맨스 누아르나 사극’이 한국영화를 지배하는 가운데, 데뷔작을 내놓은 여성 감독들은 남성 감독들에 비해 두 번째, 세 번째 장편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건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두 번째 작품까지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임순례, 이정향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임순례 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든 지 6년 만에 명필름과 재결합해 어렵게 <우생순>(400만 이상의 관객 동원)을, <집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정향 감독은 10년 만에 <오늘>(2011)을 만들었다.
현재는 남성들과 비교해봤을 때 여전히 적은 수이긴 하지만 능력 있는 여성들이 영화산업에 꾸준히 들어와 차근차근 경력을 쌓고 있고 영상 관련 교육기관에서도 여학생이 반을 넘어섰다. 위에 언급한 이들 이외에도 최근 5년간 안선경, 노덕, 신아가, 신수원, 정주리, 윤가은, 전고운, 김동명, 정가영, 이윤정, 유지영 등의 재능 있는 감독들이 등장했으며,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김보라, 김옥섭, 김유리, 한가람 등 데뷔작을 내놓은 여성 감독들이 대거 수상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프로듀서와 제작자 측면에서도 <감시자들>(조의석?김병서, 2013)을 제작한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 <베테랑>(류승완, 2015)을 제작한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암살>(최동훈, 2015)을 제작한 ‘케이퍼 필름’ 안수현 대표는 현재 한국영화 흥행 코드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현재 신혜은, 김무령, 국수란, 백지선, 이안나, 윤창숙, 강현, 강지연, 제정주, 김지혜, 구정아, 강가미, 안보영 등의 프로듀서들이 경력, 규모, 장르, 제작 방식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변영주 감독
여전히 소수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높이다
1994년 정자가 극장 매표소의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해방의 순간을 잠깐 경험한 후 이제 15년이 지났다. 정자의 일탈이 곧 일상으로 복귀된 것처럼 1990년대 중후반 뜨겁게 일어난 여성 감독과 프로듀서의 뉴웨이브는 지속적으로 강력한 물결을 만들지는 못했다. 양적으로 여전히 소수에 의지한 파도는 솟구치다가도 때때로 그 힘을 잃고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 2018년 오프 스크린과 온 스크린에서 여성 영화인의 활약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관객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 목소리는 여성 영화인들이 이제까지 힘들게 일궈온 물결을 힘껏 밀어붙이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2018년 저예산 영화인 <리틀 포레스트>로 150만 흥행을 기록한 임순례 감독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독립과 상업, 작품성과 대중성, 다양한 소재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경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우생순>을 비롯해 종종 함께 영화를 만들어온 심재명 대표는 <카트> <아이 캔 스피크>를 공동 제작하면서 여성 감독, 여성 주도의 서사를 꾸준히 만들어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공동대표를 맡아 영화산업계의 오래 묵은 성 불평등 문제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두 영화인은 이제 산업에 진입하는 신인 여성 영화인들이 새롭게 갖게 된 롤모델이다. 이제 여성 영화인들의 역사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장편 극영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