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한 박남옥 감독(맨 왼쪽, 1968)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한 여성 감독으로는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가 손꼽힌다. 이 가운데 박남옥(1923~2017)은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남옥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시대와 맞지 않는 재능을 가진 여성이 어떤 고초와 좌절을 겪게 되는지 짐작하게 된다. 먼저 박남옥은 체육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육상선수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해 미술학교에 입학하려고 일본으로 밀항까지 시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가 결혼을 강요해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해야 했다. 광복 후,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입사해 스크립터를 하며 영화 경력을 쌓다가 부모의 반대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딸을 업고 현장을 뛰어다닌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6.25전쟁이 일어나자 박남옥은 국방부 촬영대에 들어가 다시 영화 작업을 한다. 1953년, 함께 종군영화를 만들던 이보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다.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미망인>(1955)은 제작비를 언니에게 빌려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제작사 이름이 ‘자매영화사’가 되었는데, 자막에는 남편 이보라가 제작자로 나온다. 박남옥은 딸을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스태프들 밥을 해 먹이면서 ‘미친 듯이’ 동부서주한 끝에 <미망인>의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감독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녹음실에서 녹음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고, 상영관을 잡기도 어려웠다. ‘최초의 여성 감독 영화’로 홍보하며 개봉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미망인>에서 주인공 이신자는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어린 딸을 키우며 어렵게 산다. 그러던 중,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자 주저하지 않고 딸을 주변 사람에게 맡기고 새 살림을 시작한다. 그러나 남자가 변심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젊은 여성이 많을 수밖에 없던 시대이기는 했지만 이신자의 결정은 당시의 통념에서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영화의 네거티브 필름이 훼손되어 후반부의 10분가량 사운드가 없고 결말 부분도 알 수가 없다. 남아 있는 필름으로 복원한 영화 첫 장면의 미장센은 6?25전쟁 이후를 나타내는데, 이때 스쳐 지나가는 일시 정지 표지판의 ‘STOP’은 하고 싶은 일을 끊임없이 ‘금지’ 당해온 감독 자신의 좌절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 같다.
<여판사> 촬영장의 홍은원 감독(1962)
여성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박남옥에 이은 두 번째 여성 감독은 홍은원(1922~1999)이다. 홍은원은 경기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에 만주로 건너가 일제가 세운 만주신경음악단 성악부에 들어갔다. 신경음악단이 만주영화주식회사와 자매회사였기 때문에 영화 현장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 후 귀국한 홍은원은 최인규 감독의 <죄 없는 죄인>(1948)에서 스크립터를 맡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많은 영화에서 스크립터와 조감독을 하면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시나리오(<유정무정>(신경균, 1959), <젊은 설계도>(유두연, 1960) 등)까지 집필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 일한 지 10여 년 만에 <여판사>(홍은원, 1962)로 감독 데뷔했다. 여성 판사가 열등감 느끼는 남편과 시기심 많은 시어머니 때문에 겪는 애환을 그린 이 영화에는 전성기를 누리던 1960년대 한국영화의 미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5)을 잇달아 연출하면서 홍은원의 감독 생활은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 홍은원에 대한 자료를 보면, 박남옥이 감독이 되는 과정에서 겪은 고초를 겪지는 않은 것 같지만, 지방 배급업자들의 횡포와 불안정한 제작 환경을 견디기는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연출 기회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홍은원은 영화 현장을 떠나 시나리오 작업을 비롯한 글쓰기에 전념했다. 홍은원이 남긴 세 편의 영화 가운데 <여판사>는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해,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두 편은 여전히 유실된 상태다.
카메라 앞뒤에서 맹렬하게 활동한 최은희
최은희(1926~2018)는 한국영화사의 손꼽히는 스타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한편으로는 4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최은희가 톱스타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연출까지 도전하게 된 계기는 남편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가 컸다. 최은희가 주연까지 맡은 <민며느리>(1965)는 ‘톱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그녀는 출연은 하지 않고 연출만 맡은 <공주님의 짝사랑>(1967)과 <총각선생>(1972)을 찍었다. 앞의 두 편은 신상옥의 영화사인 신필름에서 제작했지만, 나머지 한 편은 새한필름에서 만들었다. 신상옥은 최은희가 감독한 영화를 통해 신필름이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영화사’로 각광받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홍보는 계속 ‘감독 최은희’가 아니라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에 방점을 두었다. 하지만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가 파국을 맞은 다음, 두 사람이 1978년에 차례로 납북되면서 남한에서 최은희의 감독 경력은 막을 내린다. 1984년, 최은희는 북한에서 <약속>을 연출해 감독작은 모두 4편이 된다. 아마도 신상옥의 조력이 없었다면, 최은희가 영화를 찍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남긴 작품을 보면 감독의 정체성을 추구함으로써 스타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강렬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첫경험> 촬영장의 황혜미 감독(맨 오른쪽)
여성기획자이자 상업영화 감독 황혜미
황혜미(1936~)는 1970년대에 데뷔한 여성 감독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황혜미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가 1961년 김동수와 결혼하고 귀국했다. 그녀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매료되어 영화로 만들 기획을 했다. 그렇게 탄생한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7)는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도 잘됐다. 황혜미는 단숨에 젊은 여성 기획자로 이름을 알렸다. 1970년, 황혜미·김동수 부부는 영화사 ‘마벨코리아’를 설립했다. 첫 작품으로 황혜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데뷔작 <첫경험>(1970)을 제작했다. 이 영화로 황혜미는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불륜을 소재로 여성의 성적 욕망을 파격적으로 그린 이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후 황혜미는 <슬픈 꽃잎이 질 때>(1971)와 <관계>(1972)를 잇따라 제작·각본·연출했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그녀는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로버트 와이즈, 1965)이나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참고하거나 패러디하면서 작품성보다 상업성을 추구했지만, 관객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실패의 여파로 그녀는 영화계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남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유실된 상태다.
이미례 감독
10여 년의 부재 끝에 등장한 이미례 감독
이미례(1957~)는 황혜미 이후 10여 년의 부재 끝에 등장한 여성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재학 시절에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해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로 데뷔했다. 비행 청소년과 가족의 갈등을 그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바로 두 번째 영화 <고추밭의 양배추>(1985)를 찍는다. 1987년에는 캠퍼스 커플의 사랑을 그린 <물망초>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1988년, 이미례는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세 편의 하이틴 영화 <학창보고서>(1997), <영심이>(1990),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1991)를 찍었다.
이미례는 작품성을 인정받거나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고, 당시까지는 유일하게 6편의 영화를 찍은 여성 감독이자 영화계의 홍일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계속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제작자들이 깊이도 없는 청소년 영화만 맡기는 바람에 청소년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것도 싫고, 찍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없는 데다 억지로 쿼터를 맞추려고, 아니면 장사하려고 한국영화를 찍는 분위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잠시 쉬려고 그만둔 건데,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하다 보니 세월이 금방 흘러버렸다. 2001년, 이미례는 영화계를 떠난 지 10년 만에 산악영화 <화이트 케어>를 들고 컴백을 시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초창기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한 여성 감독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출신 배경과 성장 환경 등의 차이가 영화계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을 둘러싼 영화제작 환경은 점점 나아진 것 같다. 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더 많은 영화를 찍었다면, 그들이 남긴 많지 않은 작품들이라도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면, 한국영화사는 훨씬 더 풍부한 자산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