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문성근)과 J(강수연), 둘은 끊임없이 서울 시내를 배회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이듬해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올림픽 이후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탄압받는 공안 정국은 계속되었고, 여당은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깜짝 발표한다. ‘민주투사’ 김영삼이 평생을 싸워온 그들과 손잡은 것이었고, 결국 그는 1993년 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기보다 인위적인 결단에 의해, 즉 정치적 야합으로 인해 한국의 ‘이념의 시대’는 몰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문화의 시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의 시대’로 들어섰다(「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1990년대 초반 한국 소비문화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로 자가용이다. 1992년 자동차 대수가 500만 대를 돌파하며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 산업은 정경유착의 산물이었고, 할부 판매 그리고 이와 결합한 광고라는 ‘판촉’(마케팅을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술은 은행과 언론에도 호황을 안겨주었다. 1991년 4월 시인 유하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이듬해 4월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내놓은 것은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와 한국식 자본주의를 예단한 것이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0대가 부상한 것도 바로 이때다. TV의 트렌디 드라마와 그 스타들이 출연하는 광고는 대중문화를 소비문화에 밀착시키며, 우리의 일상 깊숙이 소비라는 감각을 안착시켰다. 현대 한국 사회의 자본 중심적 가치관과 그 양상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화계도 변화의 기로에서 요동쳤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지만, 외화 직배로 상징되는 글로벌 기업의 시장 진입은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1989년 110편, 1990년 111편, 1991년 121편, 1992년 96편 제작된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 들어 60편대로 제작편수가 줄었고, 한국영화의 상영 비중 역시 1990년 28.7%에서 1993년 15.4%로 준 이후 1990년대 내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보여준 흥행 파워는 시장 개방의 결과를 명백히 보여줬다. 상영 외화 중 직배의 비중은 15% 내외였지만, 동원 관객 수로 치면 50%를 훨씬 넘겼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이 합자한 비디오 회사 CIC가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뒤이어 대기업들이 판권 경쟁에 뛰어들며 형성된 비디오 시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관 흥행 외에도 수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유화 조치로 생겨난 영화사들의 제작 기반이 되어준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다수의 프로덕션이 비디오용 에로티시즘영화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1990년대 초 영화기획사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기획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의 변화가 가져온 순기능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대통령 연례보고에 할리우드영화 <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스티븐 스필버그, 1993)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자동차 150만 대의 판매 수익과 맞먹는다는 보고가 올라가면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케이블TV 프로그램이라는 창구 효과(window effect)를 기대한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흥행업’으로 비하 받던 충무로 영화산업은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지방 흥행업자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던 방식에서, 조사기획을 거치고 대기업의 결제 라인을 통해 자금이 집행되는 제작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이 흐름과 맞물린 것이 바로 ‘기획영화’라고 기록되는 제작 방식이다.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시작은, 1992년 신씨네의 기획으로 익영영화사가 지방배급업자와 삼성으로부터 제작비를 투자받아 만든 <
결혼이야기>(김의석)다. 영화는 서울에서만 5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산업’적 모델을 만들었다. 현대 한국영화의 특질을 특유의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로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영화가 출발점일 것이다.
산업으로서의 성장이 길을 넓히면서, 한국영화의 미학도 확장되어갔다. 1990년대를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직전인 1980년대 말 ‘코리안 뉴웨이브’의 작가주의 감독군과 ‘장산곶매’ 등 독립영화 진영의 장편 극영화 활동이 있었고, 특히
장선우는 이후 작가주의 감독들의 미적 터전을 마련하며
홍상수,
이창동 등의 작업을 예고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작업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의 작가주의 영화를 연결한 가장 핵심적인 흐름이었다.
장선우 감독
도발적 화두와 거침없는 실험, 가장 논쟁적인 감독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선우는 19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진학해 1976년 시위 주도의 여파로 방위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최선전에서 활동했다. 영화판으로 발을 옮긴 것은, 1980년 복학 후 민주화운동에 합류했다가 6개월간의 징역을 살고 나서였다.
이효인 교수와 한 인터뷰(「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에 따르면, 합법적이고 생활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었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영화예술로 표현해야 한다는 판단 역시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1980년 11월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을 관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장선우는 이장호 감독의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의 각본(크레디트:
장민승)과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후,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며 영화평과 시나리오를 썼다. 이장호 연출부의 조감독이던
선우완과 같이 <
서울황제(원제: 서울예수)>(1986)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검열의 수모 끝에 극장 개봉에도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둘은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작가와 PD로 호흡을 맞추며 영화 복귀를 준비했다.
장선우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
성공시대>(1988)다. 자본주의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그의 이름을 충무로에 각인했다. 그가 비평적으로 주목받는 지점은 영화적 화두와 미학적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영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우묵배미의 사랑>(1990)과 하일지의 소설을 영화화한 <
경마장 가는 길>(1991)에서는, 사회에 대해 직접 발언하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환했다. 전자는 서울 근교 하층 계급의 삶을 해학과 연민 어린 시선을 통해 보여주며 ‘묘사의 진실성’을 화두로 삼았고, 후자는 지식인 계층의 허약한 내면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포착하며 ‘주관적 객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
화엄경>(1993)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았고,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씻김>을 거쳐, 1996년 최윤의 원작을 영화화한 <
꽃잎>을 내놓으며 광주항쟁을 대중예술 매체인 영화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하던 1990년대 중반, 이 영화는 비평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며, 충무로의 상업영화를 통해 처음 광주를 환기시켰다는 작품의 가치를 배가했다.
한편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94년 성을 전면에 내세운 장정일 원작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흥행과 화제의 중심에 선 후, 1997년에는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문제작 <
나쁜 영화>를 디지털 질감으로 선보였다. 세기말에는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
거짓말>(1999)을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오래된 논쟁거리인 창작물의 표현 수위 문제를 부각했다. 당시 장정일의 소설은 음란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장선우의 영화는 무혐의 처분과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성냥팔이 소녀」를 모티프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을 연출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차가운 평가를 받았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지식인 남자 R의 비루한 현실
영화는 공항을 나서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R(
문성근)이 돌아왔다는 ‘누군가’(실은 감독의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5년 만에 돌아온 R은 파리에서 동거한 J(
강수연)와 재회한다. 하지만 J는 한국과 프랑스는 다르다는 석연찮은 말로 R과 섹스하기를 거부하고, 화가 난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다. R은 오랜만에 아내(
김보연)와 자식들을 만나지만 이미 이혼을 통보한 탓에 전혀 반갑지 않다. R은 오로지 J와 섹스하기만 갈망한다.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나 다방과 식당을 전전하며 관계를 요구하지만, 여관행은 번번이 거부당한다. 한편 대구의 집에 내려가면 아내는 이혼을 거부한다. R은 자신이 써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J가 자신이 써준 글로 문학비평가로 데뷔한 사실을 알고, 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며 그를 떠나려고까지 하자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R은 좀처럼 J를 떠나지 못하고, 되레 한국을 떠나 같이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J는 끝내 R을 거부한다.
영화의 중심 인물은 지식인 남자 R이다. 그는 프랑스라는 1세계와 한국이라는 3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인데, 특히 3세계에 처한 그의 비루한 현실은 대구의 가난한 고향집을 통해 그려진다. R은 J를 만날 때마다 프랑스를 떠올리며 “우리 모처럼 산책이나 할까”라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걷는 건 산책이 아니라 노동일 뿐이라고 대꾸한다. R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 동거한 서울의 J 혹은 그녀와의 섹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J는 계속 R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그는 (한동안 회자된 대사인)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며 지식인의 허세를 노출한다. 그는 그녀를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섹스를 거부한다. R의 추궁에 J가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하자 그의 비참함과 지질함은 극에 달한다. R은 J에게, 결혼할 남자에게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동거한 이야기를 했느냐며 “그런 소릴 하면 너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그 사람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고통 때문에 바람을 피우게 되고 끝내는 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R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말이기도 한데,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 사유로 나를 키워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지만, 실은 아내의 혼전 남자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가 R의 글을 문예지에 내서 당선되었다고 사실을 털어놓은 후, 그의 요구는 애걸과 협박 사이에서 후자로 무게를 옮긴다. 급기야 R은 J에게, 자신의 글로 문학박사가 되고 문학평론가가 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재판을 걸겠다는 것이다. 결국 섹스는 하게 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둘의 지난한 만남은 계속된다. J가 R이 아닌 결혼할 남자를 택하겠다고 말하자, 이제 그는 J에게 한국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3,0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둘은 또 관계를 가지지만 결국 J는 R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 곳을 잃은 R이 시외버스를 타고 우유를 마시려 하다, 시골 아낙들이 있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우유를 흘리는 장면이다. 장선우가 “일종의 경련처럼 찾아온 깨달음”이라고 표현한 이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가장 불가해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도대체 R은 불현듯 무엇을 깨닫고 메모하는 것일까.
R(문성근)과 그의 아내(김보연)
카메라와 합일하는 남자 R
이 영화는 완결된 이야기를 목표로 하지 않고, R과 J, 두 남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영화의 초반부 R이 J에게 대전까지 같이 가자고 할 때, 둘의 대사와 풍경을 잡는 숏들을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언이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은 이제 차가 많아지고 올림픽대로가 생기는 등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는 J의 말과 함께 보이는 자동차 광고판이 그것이다. 또 십자가 가득한 서울 도심의 야경을 보여주는 숏 다음에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는 R의 대사가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의 목적대로 곧바로 둘의 관계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줄곧 자동차 안, 다방과 여관방의 R과 J를 포착하며, 지식인 남녀의 내면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의 지적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의 창출보다 현실의 표면을 기록하는 것”에 치중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분명 이후 홍상수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R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나)의 내레이션으로 열고 닫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R이다. 장선우 역시 포착했듯, 하일지의 원작 소설은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3인칭을 탈피해 나라는 존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R이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합치는 방식으로 감독이 목적한 ‘주관적 객관성’을 실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주관적인 관찰자를 벗어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R이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R의 주관적 시점으로 마중 나온 환영 인파가 보이지만, 카메라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전환해 R을 잡는 식이다. 또 R을 포착하던 카메라가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R의 주관적 시점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R이 지나가는 사람이나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카메라 역시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다. R이 다방에서 껌을 사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껌 파는 여성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의 주관적 시점으로도 활용된다. 또 J와 만난 다방 장면에서, R을 비추던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다방의 어항을 비추다가 다시 돌아오면 카메라의 숏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다음 숏이 J를 향한 그의 시점 숏이라는 점에서 숏의 논리는 한층 복잡해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1인칭 화자가 날짜를 혼동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시간은 순전히 R의 주관적 감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카메라와 R의 주관적 시점이 합쳐지는 숏 운용은,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감독의 태도를 지지하는 동시에 시간의 모호성을 탁월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1990년대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
‘코리안 뉴웨이브’ 작업은 1990년대에도 진가를 발휘했다. 장선우의 영화는 물론이고,
박광수의 <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정지영의 <
하얀전쟁>(1992), <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이명세의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 <
첫사랑>(1993) 등이 작가주의 미학과 대중적 감각 사이의 균형점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임권택은 <
서편제>(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1996년과 1997년은 2000년대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이 각각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
악어> (1997), <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한 해다. 특히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연출부에 참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이창동은, 소설가 출신다운 이야기꾼으로서의 내공에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결합하며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신중한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