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래 감독: 1970년대 군소 영화사의 영화 기획과 지방 흥행

by.공영민(영화사 연구자) 2018-09-07조회 2,119

처음에는 배우가 되고 싶어 목포에서 상경해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했다. 1956년 학교 친구들과 함께 방문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참여한 조명부 일을 시작으로 배우가 아닌 기술 스태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화 현장을 보니 “레디 고를 부르는 감독이 더 멋져 보여” 배우보다 감독을 꿈꾸게 되었다. “전부를 알아야 하는 감독이 되기 위해 조명과 촬영을 열심히 공부”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또 한 분의 아버지’라 칭할 만큼 평생의 인연이 된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1964),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를 비롯해 1960년대 신필름이 제작한 수십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1970년 <울기는 왜 울어>로 꿈에 그리던 감독으로 데뷔한 김종래 선생의 영화 입문 이야기다.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의 구술자인 김종래 감독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말까지 조명과 촬영 스태프로, 1970년대 초반에는 감독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KBS 다큐멘터리 PD로 활동한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2016년 구술에서는 1970년 신필름을 퇴사한 후 연출한 5편의 영화 <울기는 왜 울어>, <소문난 남자>(1970), <호랑이 꼬리를 잡은 여자>(1970), <아마도 빗물이겠지>(1971), <검은 안경>(1971)을 중심으로 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의 일면을 들려주었다.

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여간해서는 감독 데뷔가 쉽지 않았던 한국영화계의 불안정한 상황이 어떻게 대명제작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1970년 오랜 꿈이던 감독 데뷔를 위해 신상옥 감독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필름을 퇴사해 직접 제작까지 한 <울기는 왜 울어>는 평단의 호평은 받았지만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결국 데뷔작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예술영화를 지향하는 꿈을 버리고 코미디영화 <소문난 남자>를 기획·제작해 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이 영화를 통해 연이어 감독작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연출한 5편은 모두 군소 영화사인 새한영화사와 삼영영화사에서 대명제작한 영화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김종래 감독의 구술은 1970년대 초반 군소 영화사의 영화 기획과 지방 흥행의 관계, 야외촬영의 용이성, 투자 환경의 불안정성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구술은 5편의 영화제작 배경부터 촬영 에피소드 그리고 흥행 결과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명망 있는 감독이 아닌 경우 영화계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빨간 마후라>를 비롯한 신상옥 감독의 유명 작품을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자가 쉽게 나서지 않아 본인이 직접 제작해 데뷔할 수 있었다는 구술은 1960년대 후반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한 영화 산업의 단면을 보여준다.

데뷔작의 흥행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제작한 영화가 코미디영화 <소문난 남자>인 것은 군소 영화사나 대명제작의 경우 특히나 지방 흥행사들의 의견 내지는 입김이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촬영 에피소드는 지방 흥행사의 투자 배경에 촬영 현장의 입소문과 홍보가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구술자는 한정된 제작비로 인해 엄청난 인파가 주인공 박노식을 따라붙는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시내 한복판 촬영을 강행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홍보 효과를 일으키며 지방 흥행사들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작 환경이 영화 스타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은 야외촬영에 관한 구술이다. 한정된 제작비로 스튜디오와 장비 활용 등에 제약이 있고, 대형 영화사가 갖춘 시스템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촬영을 간소화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유로 야외촬영과 흑백 촬영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술은 이 시기 군소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에서 일련의 공통된 스타일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무 살 시절부터 꿈꾸던 영화감독이 되어 자신의 이름을 새긴 영화 5편에 대한 희로애락의 기억을 가감 없이 전달해주신 김종래 선생의 구술은 1970년대 한국영화계를 좀 더 폭넓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는 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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