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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2017)은 인물 간 대립과 긴장의 힘이 전면에 묵직하게 자리한 영화다. 영화의 주요 테마인 ‘대립’은 대사뿐만 아니라 과감한 앵글의 사용과 독특한 편집 등 영화언어의 실험으로도 구현된다. 네 번째 장편을 통해 장중한 리듬과 균형 감각으로 시대적인 화두를 던진 황동혁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일시 | 2018년 4월 9일(월)
참석자 | 황동혁 감독,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기록 및 정리 | 이아림 「영화천국」 편집부
사진 | 윤관식 포토그래퍼
장소 | 마농트로포
김형석 <남한산성>은 일반적인 사극과 많이 다르다. <명량>과 같이 장르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거나 <군함도>처럼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게 아닌, 일종의 알레고리가 강한 사극이다.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원작의 행간을 살릴 필요도 있었을 텐데, 어땠나?
황동혁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나 느낌이 워낙 강렬해서 그것을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떠올린 그림이 있어 장르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찍으려면 제작비가 많이 들 것 같고, 내 머릿속에는 이 영화가 일반적인 상업영화와 결이 다른 영화로 그려졌기 때문에 그걸 설득하는 게 고민이었다. 김윤석, 이병헌, 박해일, 고수도 다른 영화에서는 원톱, 투톱을 하던 배우들인데 이 영화에서는 비중이 무척 낮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시간이 중간에 매우 길다는 데 당황했을 수 있다. 그런 점이 숙제였다.
김형석 프롤로그를 포함해 총 12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의도가 있나?
황동혁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다. 촬영과 편집을 모두 끝냈는데, 투자사에서 모니터링 시사를 진행했더니 10~30대 초중반까지 젊은 관객 사이에서 ‘길다’ ‘지루하다’는 반응이 있었다. 애초에 유장하고 호흡이 긴 영화를 의도했기에 장면을 덜어낼 생각은 없었고, 방법을 찾다가 챕터를 나누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 영화제 등 해외 공개 버전에는 챕터가 없다.
김형석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삼전도 신(scene)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고조되길 기대하는 지점에 가장 비통하고 정서적으로 침체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건 영화의 난점으로 여겨질 법하다. 시나리오 과정에서 그걸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황동혁 사실 그 부분이 좋아서 이 작품을 시작한 거라 난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상업적인 관점에서는 이야기나 감정이 가장 바닥으로 내려가는 순간 영화가 끝나는 게 난점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소설을 읽기 전까지 병자호란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것 말고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논쟁을 벌인 이들이 누구고 정확히 어떤 논리를 가지고 싸웠으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에 대해 잘 몰랐는데, 다른 역사책도 찾아보면서 그 사이에 숨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관객에게 그걸 전달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느꼈을 패배감이나 비참함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더 많이 고민한 것 같다. 그 갈등을 장엄하고 비장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김형석 편집과 앵글, 리듬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릭터보다는 편집의 흐름이 이 영화를 규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개성적인 신으로,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이 외행전에서 대립하며 이야기하는 신을 꼽을 만하다. 숏을 거의 세 종류만 썼더라. 인조(박해일)의 얼굴, 정면에서 두 사람이 보이는 숏, 두 사람 각자의 원 숏. 인서트도 없었다.
황동혁 이 영화에서 안 하려고 한 게 몇 가지 있는데, 디졸브와 플래시 백, 슬로모션 등 관객을 감정적으로 과거로 이끄는 관습적인 표현은 배제하려고 했다. 건조하게 잔재주를 부리지 않을 때 그 안의 퍼포먼스가 강하게 살아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훈 작가의 문체도 그런 편이고. 각 숏도 앵글을 화려하게 짜지 않고 아주 심플하게 구성했다. 그 부분에 공을 많이 들였다. 특히 외행전에서 대화하는 신이 많은데 신마다 차별점은 조금씩 뒀다.
김형석 설정 숏과 무관한 풍경 숏, 이미지 등은 신의 시작에 많이 사용됐다. 그런 부분은 정서적인 효과를 위한 것인가?
황동혁 그렇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 떠올린 풍경이 있다. 추위와 황량함, 모든 것이 처참하고 말라있을 것 같은데 그게 묘하게 아름다우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상반되는 감정이 섞이더라. 인물이 없는 인서트 숏도 마찬가지지만, 이 영화에서는 인물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 숏을 반복 사용하며 그런 복합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황량한 풍경과 동양화같이 아름다운, 흰 눈 덮인 산성이 그 안의 인물이 겪는 갈등 장면과 부딪칠 때의 콘트라스트를 살려보고 싶었다. 극단적으로 멀리 떨어졌다가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구성이 이 영화 안에 여러 곳 있다.
김형석 한국영화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지 오래된 것 같다. 극단적으로 크거나 작은 크기의 숏을 붙여 영화의 독특한 날(에지)을 살리는데, 이게 일반적인 편집 방식은 아니니까. 처음부터 계획한 건지 아니면 편집 단계에서 탄생한 건지 궁금하다.
황동혁 콘티 때부터 그렇게 계획해서 거의 그대로 찍고 그대로 붙인 것이다. 대부분의 장면과 흐름이 콘티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김형석 최명길이 등청하지 않은 날 홀로 관사 마당의 눈을 쓸다가 김상헌과 마주치고 조용히 목례를 나누는 신 역시 무척 인상적이다. 이 장면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함의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대사 한 마디 없는데 정서적으로 울림이 있다.
황동혁 원작에도 있는, 김훈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갔을 법한 장면이다. 몇 줄 안 되는 문장에 최명길의 지극히 일상적인 일과와, 대립하는 두 사람이 마주쳐 조용히 목례를 나누는 게 묘사되는데 아주 인상적이어서 영화에도 담았다. 내게는 정치의 이데아를 구현하는 장면과도 같다. 대립하는 관계지만 이들은 서로에 대해 깊이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나. 이런 모습을 현실에서도 보고 싶은 마음, 이게 이 나라 위정자들의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 들어간 장면이다.
김형석 <남한산성>에서 중요한 ‘대립’ ‘대조’라는 테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스타일로도 구현된다. 최명길과 김상헌 둘이 주로 대립하는데 중간에 이시백(박희순)이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중립적 휴머니스트라 할만한데 인물의 이런 입장과 관계를 대사보다는 간단한 구도로 표현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황동혁 대립되는 의견의 충돌에 관한 영화이고,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바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야 했다. 의견이 나뉘는 인물들을 좁은 공간에 밀착하도록 두며 같은 것을 공유하는 느낌을 주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마지막 갈등 신에서도 한 사람은 방 안에, 한 사람은 밖에 있다. 결국 같이 갈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다.
김형석 인조를 제외하고 영화의 핵심 인물은 최명길·김상헌·이시백·김류(송영창) 넷인데, 김류는 유일하게 장르적인 인물이다. 영화 전체에서는 튀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에게만 전형성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황동혁 소설에서도 김류는 현실주의자·기회주의자이고 좋아하기 힘든 내력의 캐릭터다. 소설에서 인조와 김류가 주고받는 대사 안에 견제와 질책이 담겼는데 그게 묘하게 코믹하게 느껴져서 영화적으로 조금 더 살려보고 싶었다.
김류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쓴 것은, 그가 하는 말이 그의 입장에서는 모두 진실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짓을 지어내는 악당은 이 영화의 톤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류가 하는 말은 그의 신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성에게 사대부의 옷을 벗어줄 수 없다는 것도, 무관에게 전투의 지휘권을 줄 수 없다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거지. 그 점을 송영창 배우에게도 잘 얘기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진짜라고 믿는 확신범의 모습을 그렸다.
김형석 수미상관의 요소가 있다. 김상헌은 영화 도입부에 나루(조아인)의 할아버지를 칼로 죽이지만 말미에는 그 칼로 자결하고, 최명길은 뒷모습으로 등장해 뒷모습을 보여주며 끝나지 않나. 이런 요소로 서사의 리듬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황동혁 수미상관 구조에 나도 모르게 집착하는 것 같다(웃음). 앞에 했던 것을 다른 상황에서 다시 보여줌으로써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짚어주는 것이다. 김상헌의 칼의 의미도 그렇고, 최명길 뒷모습 역시 처음에는 위풍당당했지만 마지막에는 초라해진 느낌을 의도했다.
김형석 편집 톤에 영향을 주는 것 중 하나가 죽은 동물의 이미지다. 영화에서 개, 사슴이 죽는 것, 고기를 얻기 위해 말을 잔혹하게 도살하는 것도 나오고, 그러한 반복이 나중에는 북문전투 패전 후 죽은 사람이 널린 장면으로 이어진다.
황동혁 그것은 내가 느끼는 전쟁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다. 전쟁과 죽음이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데 대한 이미지다. 동물이 죽고, 죽은 동물을 먹은 인간 역시 전쟁통에 죽는 악순환·죽음의 고리 같은 게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소설에도 동물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청각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미지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김형석 사람의 잘린 머리를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특히 영화 후반부에 인조가 삼전도로 향할 때의 장면에서는 잘린 머리들의 시점 숏처럼 표현된다.
황동혁 그렇다. 역사 기록에도 오랑캐 수급(首級)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그걸 여과 없이 세게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종반까지는 길가에 매어놓은 줄에 오랑캐 머리가 걸려 있었는데 패전 후 장면에는 오랑캐가 아닌 가짜 수급(조선인)만 남아있다. 그게 전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이를 배경으로 왕이 삼전도로 향하는 뒷모습으로 그 출성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다.
김형석 전투 신도 컷을 많이 나누지 않고 전지적 시점으로 공간을 바라보듯, 일반 전쟁영화와는 다르게 촬영했다.
황동혁 여기서 전쟁은 학살당하는 이야기다. 영웅도 없고 멋있게 찍을 이유가 전혀 없는 액션이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청나라의 압도적인 기마부대에 의해 학살당하는 조선 조총수들의 모습은, 마치 그 시대에 실제 있었을 법한 규모로 보여주고 싶어 물량을 최대한으로 투입해 촬영했다. 심지어 그 장면에는 주요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웃음). 그래서 시나리오 단계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런 참담한 실패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 뒤에 이어지는 논쟁 장면들도 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형석 감독님 작품에는 할머님이 등장하신다. 그 신의 톤은 이전과는 확 다르게 마치 다큐 같기도 하고, 묘한 연민이 전해온다. 본인의 할머니를 영화에 등장시키는 이유가 궁금하다.
황동혁 할머님이 올해 100세다. 영화에 드러난 느낌은 아마도 내가 할머니를 바라보는 느낌과 같을 것이다. 평생 고생하셨고 그게 온몸에 그대로 쌓인 분인데, 공교롭게도 영화마다 그런 이미지가 필요한 장면이 있어 모시게 됐다. <도가니>(2011)에서 가난 때문에 합의해주는 민수 할머니로, <
수상한 그녀>(2014)에서는 주인공이 ‘저렇게 늙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주인공과 대비적인 이미지로 한 번 더 등장하셨고, <남한산성>에서는 전쟁으로 집이 뜯기고 고통받는 민초를 보여주고 싶은데, 할머니가 제격이다 싶어 모시고 촬영하게 됐다.
김형석 사극은 특성상 현재 시점에서 읽게 되는 영화고, 이 영화는 대사에도 등장하듯 결국 ‘임금이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다. 특정 메시지보다는 화두를 던지는 영화라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수위는 어떻게 맞췄나?
황동혁 절묘한 게, 원작 소설도 누구의 말이 맞을지 독자가 고민하도록 쓰여 있다. 심정적으로는 김상헌에 대한 연민이 조금 더 느껴지도록 장치되어 있지만 최명길의 실리적인 논리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맞다고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 맞춰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점을 취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균형을 잘 맞추고, 지금 상황에서 생각해볼 만한, 그리고 위정자 각자가 반성할 만한 화두를 잘 던지는 게 중요했다. 대의와 자신이 믿는 신념을 좇을지, 아니면 조금 굽히고 들어가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의 문제는 평범한 사람도 삶의 매순간 부딪히는 문제일 것이다.
김형석 개인적으로는 최명길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끝났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나고 날쇠(고수)와 나루가 일상을 맞이하는 장면과 삼전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이어진 두 신이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황동혁 삼전도 비가 나오는 부분은, 챕터를 나눈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관객에게 병자호란과 현대의 접점을 심어주며 이를 옛이야기로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는 첨언이다. 역시 해외 공개 버전에는 없다(웃음). 날쇠가 등장하는 에필로그는 나 역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관객이 극장을 나가면서 느끼는 심정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야 하고, 그게 최명길의 뒷모습이어야 할까 생각한 것이다. 이 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영향을 수도 없이 겪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은 정치인의 힘이 아니라, 그 고통을 받고 견디면서도 땅에 씨를 뿌린 민초의 힘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폐허가 되었다가 초봄을 맞이하는 민초들의 장면이 필요했다.
김형석 이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꾸준히 회자될 것 같다.
황동혁 개인적으로 흥행 성적을 이전만큼 신경 쓰지 않고 만든 작품이다. 전작들의 흥행을 마일리지 삼아,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으로서 감독이 된 이유를 찾고자 한 작품이랄까. 부끄러움이나 타협 없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 어렵고 소중한 기회였다.
김형석 <마이 파더>(2007)는 휴먼 드라마, <도가니>는 스릴러 요소가 있는 사회파 영화, <수상한 그녀>는 코미디 장르 영화였다. 감독의 색깔은 뭘까 관객이 의아할지 모르겠다. 결국 <남한산성>이 감독님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고 봐도 될까?
황동혁 <남한산성>이 조금의 타협 없이 만든 영화지만 앞으로 이런 영화를 계속할 건지는 다른 문제다. 근본적으로 가장 하고 싶은 방식의 영화지만 나는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라 또 바뀔 것 같다.
한편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도 만족하셨는데, 의외로 가장 맘에 드는 대사에 대해 제일 마지막 신의 날쇠가 나루에게 하는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를 꼽으시더라. 그게 어떤 꾸밈도 없는 백성의 언어라고 하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