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주의하게 영화사 책을 읽은 독자들은 최초의 장편 극영화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이라고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첫 번째 장편 극영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첫 번째 장편 극영화가 상영된 곳은 뉴욕이나 LA, 혹은 파리가 아니라 호주의 멜버른이다. 1906년 12월 26일, 멜버른의 애서니움 홀 (Athenaeum Hall)에서 <켈리 강도단 스토리 The Story of the Kelly Gang>(찰리 테이트)가 상영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4,000 피트 길이의 상영시간이라고 한다. 당시 영화들은 영사 조건에 따라 상영시간이 서로 달랐으며 자료에 따라 약(approximate) 60분 혹은 약 70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다음 2년 뒤 영국에서 상영되면서 유럽에 알려졌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아쉽게도 <켈리 강도단 스토리>는 영화의 일부만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복원을 거쳤고, 현재(2006년)는 (일부 프린트가 부식되어 망실된 장면을 포함해서) 971피트(약 16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실존인물인 네드 켈리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855년에 태어난 네드 켈리는 어린 시절부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폭행, 소 도둑질, 경관 살해 미수를 거쳐서 세 명의 친구와 함께 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무장 강도단이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그들은 은행 두 곳을 털었고, 심지어 열차 탈선을 기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본격적인 소탕 작전에 나섰고, 켈리 강도단은 대담무쌍하게도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또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철로 만든 갑옷을 만들었다. 결국 경찰과 대치한 끝에 전원 살해당하고 네드 켈리만 생포되었다. 네드 켈리는 1880년 11월 11일 교수형을 당했다. 이 추격전과 소탕 작전, 철갑 갑옷, 교수형, 여기에 네드 켈리가 당시 호주의 민중봉기를 계 획하고 있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와 도적이었지만 로빈 후드처럼 가난한 이들에게는 선행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풍문 속의 영웅이 되었다. 아직 19세기였고, 그걸 증명할 만한 사진도 볼 수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멜버른의 커다란 극장 애서니움 홀을 운영하던 테이트 가문에서는 여기서 상영할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물론 무대에서 상연하는 쇼 프로그램이 중심이었지만 단편영화들도 상영했다. 예술적 야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이 가문의 형제 중 한 사람이었던 찰스 테이트는 경찰들이 네드 켈리 소탕 작전에 나선 다음 체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을 계획을 세웠다. 다소 놀라운 이야기지만 <켈리 강도단 스토리>는 찰스 테이트의 첫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현재 남아 있는 <켈리 강도단 스토리>에서 대부분의 숏은 아직 편집 개념이 도착하기 전에 만들어져서 카메라 앞에서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면서 몇 분이고 지속되기까지 한다. 모두 6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무려 6개월 동안 촬영되었다. 심지어 촬영기간이 너무 길어 네드 켈리를 연기한 캐나다에서 온 주연배우가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는 바람에 결국 엑스트라 중 한 사람이 그 역을 대신하면서 남은 촬영분에서 네드 켈리는 롱 숏으로만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남은 장면만으 로 본 <켈리 강도단 스토리>의 총격전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다. 단지 그것을 (톰 거닝이 말한) 초기 영화라는 ‘구경거리(attraction)’의 매혹이라고 설명하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도 종종 나는 <켈리 강도단 스토리>의 남은 장면들을 홀린 듯이 볼 때가 있다. 그것만은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