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라인> 양경모 감독 인터뷰 시대와 시스템에 대한 고민

by.이화정(씨네21 기자) 2018-03-08조회 5,502

‘작업대출’을 소재로 한 영화 <원라인>(2017)은 케이퍼무비의 속도감 있는 외형 안에, 돈을 둘러싼 시스템의 어두운 현실과 그 안에서 보편적인 욕망을 지닌 이들의 속고 속이는 관계를 통해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돈의 화려함보다는 이를 축적해가는 지하세계의 달리기를, 욕망의 비뚤어짐보다는 그 보편성을 그린다. 관객이 얻는 것은 순간적인 카타르시스보다는 간단치 않은 ‘질문’. 2005년에 실제 일어난 작업대출 사기 사건을 소재로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양경모 감독을 만나 영화 제작과정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시 | 2017년 9월 29일(금)
참석자 | 양경모 감독, 이화정 「씨네21」 기자
기록 및 정리 | 이아림 「영화천국」 편집부
사진 | 김민회 포토그래퍼
촬영 협조 | 카페 아딜브라운



이화정 <원라인>은 ‘작업대출’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시나리오를 보면 발로 뛴 흔적이 많이 엿보이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한 작업인가. 작업대출 세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어떤 루트로, 얼마나 만나신 건지도 궁금하다.
양경모 어느 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내가 영화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누군가 “혹시 작업대출이라는 걸 들어본 적 있느냐”고 묻더라. 거기서부터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그는 무척 젊은 친구였는데, 자기가 스물세 살 때 백팩에 오만 원 짜리 지폐를 가득 채워서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때부터 관심이 생겼고, 그 친구를 통해 취재를 많이 했다. 취재는 3년 이상 했고 집필에 5년 이상 걸린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며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사실 ‘업자’들 같은 경우는 소개를 통해 만나기 어렵다. 그들은 서로 속고 속이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루트로 만나기는 힘들었고,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하나 뚫어갔다. 은행 관계자들, 제도권 금융업자들은 대부분 지인을 통해 만났고.

이화정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보면 ‘전문용어’같은 디테일한 표현이 많다. 영화를 흥미롭게 하는 지점인데, 취재 과정에서 들은 실제 그들의 언어를 십분 활용했을 것 같다.
양경모 대표적인 건 ‘감는다’란 표현이다(웃음).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같이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다 보면 1분에 한 번씩 그 단어를 쓰더라. ‘코 뚫었다’(처음 거래를 시작했다)는 표현과 ‘사이즈’도 있다. 사이즈란 단어는 온 데 다 쓰인다. 우리도 평소에 사이즈란 단어를 많이 쓰지만, 그들에게는 마치 전라도의 ‘거시기’ 같은 단어였다(웃음).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다가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미와 그들의 습관이 파악됐다.

이화정 취재 과정에서 얻은 소재 중에서도 영화에 반영하는 데는 완급 조절을 하셨을 것 같다. 오히려 영화에 등장한 것보다 더 심한 케이스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데.
양경모 그렇다. 대출업자들은 자신이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믿는다. 피해자들 사례를 들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일을 못한다”고 대답한다. 작업대출을 받은 사람은 빚이 더 늘어날 것이고 신용등급이 계속 떨어져 어떤 금융권에서도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그것까지 아셔야겠어요?” 하더라. 그 단계를 넘어가면 참혹한 폭력의 세계로 접어드는 거다.

이화정 많은 스릴러 영화에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이를 액션 장르 안에서 풀어가는데, <원라인>은 그 액션의 바로 앞 단계를 디테일하게 들여다본다.
양경모 그 이후의 세계를 영화 속에 담을 것인지를 두고 PD님과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 요소를 보여줬을 때 효과나 가치를 얼마나 가질 것인지 고민했는데,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깊이에 비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그것이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화정 영화는 결국 인간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사기를 쳐도 되는가, 피해자가 받을 타격은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 물음 같은 것들이다. 소재에서 흔히 취할만한 오락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적인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경모 처음엔 호기심 때문에 작업대출에 관한 취재를 시작했지만 결국 ‘어디가 잘못된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자신을 ‘로빈후드’라고 믿으면서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하게 되더라. 감독 입장에서의 철학이 있고 그 질문에 대해 30대 후반의 내가 느낀 해답도 있지만,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금융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느냐는 질문. 사실 이를 영화 후반부에 더 힘 있게 넣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화정 왜 이 영화를 케이퍼무비(강탈영화)로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이 영화의 소재를 잘 담을 수 있는 게 케이퍼무비인 동시에, 영화가 담고자 하는 주제 면에서 보면 케이퍼무비에서 벗어난다. 굉장히 리얼한 소재를 장르물로 풀어낸 이유가 궁금하다.
양경모 사실 시나리오 초고를 쓸 때부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계속 망설인 부분이다. 초고는 굉장히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예를 들면, 초고에서 민재의 부모님은 완성본과 정반대의 사람이다. 아들에게 찾아와 네 이름으로 빚을 내달라고 하는, 그게 자식을 착취하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로 설정한 것이다. 이런 어두운 사회드라마성 시나리오에 장르의 성격을 입히지 않는다면 이런 규모의 이야기는 할 수 없다고 요구받은 게 첫 번째 이유다. 단계적으로는 제작사의 판단이 있었다.
사실 ‘케이퍼무비’라는 단어를 스스로 쓴 적은 없다. 나는 <원라인>이 ‘하이스트무비(heist movie?범죄영화)’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드라마성이 강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르라는 건 사실 영화가 만들어진 후에, 마케팅의 필요에 따라 정의되기도 한다. <원라인>의 공식적인 장르어는 ‘범죄오락영화’다. 기존 케이퍼무비가 갖는 장르적 성향이 <원라인>에 많이 들어가 있는 건 사실이다. 장르의 클리셰를 가지고 오면서 이야기의 농도가 옅어진 면도 있고. 그래도 처음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본질만큼은 꼭 담아내자는 목표를 가졌던 것 같다.

이화정 연출가로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잘 드러난 캐스팅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민재 역의 임시완 배우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 전까지 임시완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였다. 그에겐 선함, 청년의 순수함, 사회에 짓눌려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언뜻 영화의 장르적 성격을 거스르는 캐스팅으로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임시완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양경모 캐스팅에서는 고집을 많이 부렸다. <미생> 1회를 보고 바로 제작사 대표님께 임시완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고 전화를 드렸다. 소속사에라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가 연기적으로 지닌 결이 내가 연출자로서 가진 결과 만났을 때 이 영화를 현실에 발붙여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사 대표님께 정색을 하며(웃음) 꼭 그가 민재 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다행스럽게도 임시완 배우도 이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초반에는 등장인물의 캐스팅 전반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박병은 배우(지원), 박종환 배우(기태), 안세하 배우(천 형사) 모두 시나리오에서 그린 인물과는 전혀 다른 배우들이었으니까. 설득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화정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의 연령대는 20~30대다. 요즘 멀티캐스팅이 주가 되는 한국영화 등장인물들의 연령대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인물들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포진하면서 영화에 으레 나올 법한 폭력의 강도나 표현 수위가 조금 조절된 측면도 엿보인다.
양경모 작업대출이라는 소재를 갖고 왔을 때 조미료 맛을 강하게 해야만 사람들이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고 느낄까 의문이 들었다. 이 영화는 자본, 작업대출 등 온갖 자극적인 소재로 뭉친 이야기인데 그걸 과하게 끌고 가기 시작하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질문 자체가 아예 불투명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화정 주요 등장인물들을 20대로 설정하면서 청년 세대의 어려움, 그들이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사기꾼 강지원(박병은)은 청년사업가 이미지로 포장되는데, 그가 결탁하려고 하는 정치권의 연령대와 격차가 아주 크다. 소위 기성세대를 일컫는 인물들이다. 사기극을 통해서 지금의 청년 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표현하려 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양경모 지금 대학을 다니는 청년 세대와 내 세대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학자금대출’의 빈도다. 예전에 학자금 대출을 받는 건 일부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이더라. 대출이 거의 일상화된 것이다. 사회에 나올 때부터 빚을 안고 시작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고 이것이 지나친 패배주의나 염세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민재의 아버지가 민재에게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본질적인 문제는 ‘시스템’에 있는 거니까. 그런 고민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또한 나는 이제 기성세대로 진입하는 나이인데, 이러한 사회적 고리, 시스템의 문제점을 끊어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며 살고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지원이란 캐릭터는 자기가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죄책감도 전혀 없는 그런 인물이 ‘쿨하다’고 긍정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스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화정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중간 지점에서 두 세대를 바라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부패한 사회나 시스템의 문제는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아도 충분히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배경을 실제 대출 사기가 있던 2005~2006년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양경모 영화에 등장하는 뉴스 자료 중 한국은행 앞에서 신권 지폐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장면이 있다. 그때가 2005년인데 10여 년 전 실제로 뉴스를 통해 그 장면을 보면서 충격받은 기억이 있다. 저게 저렇게까지, 2박 3일 텐트를 치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싶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는데 지금 우리는 그때와 달라졌을까? 우리가 자본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나아졌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그게 배경을 당시로 둔 첫 번째 이유다. 그 뉴스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 구조를 그렇게 만든 것도 있고.

이화정 지금은 전자화폐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보편화됐고 심지어 카드 같은 물질이 없어도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이와 대비되는 실물 화폐, 특히 화폐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이 영화의 굉장한 재미 요소다.
양경모 사실 화폐의 흐름을 보여주는 컷이 편집 과정에서 많이 빠져서 아쉽다. 민재가 석구(진구)를 찾아가는 신(scene)에서 동물 살해가 이뤄지는 우시장 골목이 롱테이크로 나온다. 작업대출의 지하세계가 가장 야생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공간에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거기서부터 돈은 거꾸로 올라간다. 즉 공장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어딘가로 흘러들어가고 그게 정직하게 은행에 보관되기보다는 돈을 통해 다른 이윤을 창출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은행권에서 가장 큰 이윤을 남기는 것도 이자이고 예금?적금을 유치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부분에 대한 질문을 담은 컷을 많이 넣고 싶었으나 영화가 길어지면서 많이 편집됐다.

이화정 범죄가 일어나는 공간을 카메라에 어떻게 담아낼지도 중요한 요소였다. 민재가 시계를 사러 가는 낡은 보석상이 모여있는 공간을 보면 전형적인 느낌이 든다. 흔히 그려보는 ‘마치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오래된 공간을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공간을 굉장히 타이트하게, 인물을 압박하듯 잡지 않나. 그렇게 길고 좁은 길을 인물들이 걸어가게 만들고 뒤를 쫓아가며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데서 어떤 효과를 기대했나.
양경모 민재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은, 자신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믿지만 결국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데 가깝다. 작업대출이란 것도 남을 도와주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만 사람을 몰아내는 느낌이 강하고.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진다. 그렇게 돈에 내몰린 정서를 표현하고 싶었다. 아울러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정서가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서울은 굉장히 모던하고 높은 건물이 지배하는 도시지만, 모두가 담아내는 넓은 공간보다 우리가 담아내지 않았을 때 잊힐 만한 공간을 담아내는 것의 가치도 고려했다.
시계방 신의 경우 100% 김유경 PD님 덕이다. 그런 공간이 있어서 거길 쓴 게 아니라 시나리오에 설정한 공간인데 PD님이 어렵게 찾아냈고, 4~5번에 걸쳐서 섭외에 성공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게 가치 있을 것이고, 세트로 지으면 느낌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결국 효과적으로 구현된 것 같다.

이화정 범죄가 일어나는 어두운 세계를 디테일하게 그려낸 데 비해 사기로 모은 돈이 축적됐을 때의 화려함은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불어 돈에 대한 욕망과 관련해 전사가 설명되는 캐릭터는 민재가 유일하다. 다른 인물들은 민재가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사기 사건에 합류하게 된다. 왜 그들이 그토록 물질에 연연하는지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양경모 돈을 벌고 그것을 쓰고 즐기는 화려함을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란 얘기가 제작 과정에서 있긴 했다. 강지원 캐릭터가 그런 모습에 근접하게 묘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우 허황된 욕망을 좇는 것으로 비칠 수 있겠더라. 그런데 나는 이 인물들이 가장 평범한 야망을 지닌 캐릭터로 비치길 바랐다. 특별히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극단적으로 갈 수 있다는 걸 드러내고자 했달까. 오히려 돈에 엄청난 욕망을 지닌 캐릭터로 그렸다면 굉장히 평면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더 나쁜, 더 욕망에 찌든 사람이라 그런 결과를 낸 거야’라고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이화정 이 영화의 인물 대립 구도는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인데 석구는 너무 멋있게 그리신 것 아닌가(웃음). 능력 있고 외모도 멋있고 부도 축적했고 게다가 가치도 바로 서 있어서, 도대체 저 사람은 왜 나쁜 놈인지 알 수 없는 캐릭터다. 그런 묘사가 다소 위험할 수도 있다.
양경모 이 영화에서 분명 좋은 놈은 없다. 석구는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다.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지 실재하는 캐릭터는 아닌 셈이다. 그런 캐릭터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극장에 갈 때 그런 캐릭터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테니. 내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조언을 해줄 만한 멘토 같은 걸 생각하며 석구를 그렸다. 그래서 석구의 원죄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은 부분이 있지. 마지막에 민재가 큰 질문을 던진다. ‘작업대출이 정말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냐’고. 사실 이들은 마지막까지 반성하기보다는 각자 20억씩 챙겨 도망가는 놈들이다. 그런 라인 안에서 관객이 ‘얘네(민재와 석구)도 똑같은 놈들이네, 그런데 왜 선하다고 하지’라고, 석구의 원죄에 대한 질문을 하길 바랐던 것 같다.

이화정 원라인의 멤버들이 사기로 모은 돈을 배분하고 나를때 줄곧 아디다스 쇼핑백에 현금을 담아 나르는 게 인상적이더라. 실제 모델이 된 인물들이 꼭 아이다스 쇼핑백을 쓰나.
양경모 돈을 나르는 것과 관련해서도 회의를 여러 번 했다. 에르메스 백이 예쁘다, 샤넬이 좋다, 비닐봉투, 무지봉투 등 다양한 얘기가 나왔지. 못 정하고 있다가 한 스태프에게 ‘넌 어디에 돈을 넣어두냐’고 물으니 ‘그냥 나이키? 나이키에만 담아요’라고 답하는 걸 듣고 흥미로웠다. 상업화된 대형 회사의 쇼핑백인데, 그들은 아주 음지의 일을 하며 얻은 돈을 굉장히 보편적인 브랜드 봉투에 담는 거다. 무의식의 면죄부일까 생각하며 그 방향으로 가게 됐다. 아디다스가 보편적인 것으로 심벌라이즈돼 있다고 생각해서 정했고.

이화정 원래 의대를 졸업하고, 영화로 방향을 달리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서 영화를 공부했다. 물론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감독이 연출을 하는 경우는 많지만, 의학은 영화로 전향하기에는 큰 갭이 있는 직업이다.
양경모 사람들에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주어지는 일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이어서 의대에 갔고 일에 대한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고, 나는 고민도 없이 소니 매장에 가서 캠코더를 샀다. 사실 어렵게 모은 돈이니 며칠씩 매일매일 매장에 가 캠코더를 들여다보다가 샀다. 그걸로 다음 날 TV를 보고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 한 순간이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있던 건 아닌데, 그때까지 모은 돈을 캠코더 한 대에 다 쏟았다는 건 내가 뷰파인더를 통해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크게 드러난 사건인 것 같다. 거기엔 어릴 때부터 봐온 수많은 영화가 바탕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 몸이나 욕망이 움직이는 방향은 또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이화정 데뷔작을 개봉한 감독이 두 번째 영화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두 번째 작품을 쓰고 계실 텐데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어떤 얘기인지 궁금하다.
양경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웃음). 상업영화에 한정 지으면, 차기작으로 의미를 두고 있는 화두는 ‘카르텔’이다. 대한민국의 카르텔은 엄청난 견고함을 지니고 있고 그로 인한 의도치 않은 피해자가 많은 것 같다. 영화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화두다. 전작보다 좀 더 장르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작업이든지 꼭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많은 배우와 스태프의 창조적인 면들이 잘 들어가서, 현장이 좋은 일터이기도 하면서 그들의 인생에 의미 있는 장으로 꾸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