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큐]‘현재’를 바라보는 8개의 시선 ③④ - 개의 역사, 범전 자기 성찰적인 영화 글쓰기의 두 가지 모습

by.변성찬(영화평론가) 2018-02-20조회 2,867

김보람의 <개의 역사>(김보람, 2017)는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다. 이 자리에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개의 역사>와 맞붙여놓고 비교해보고 싶은 영화가 몇 편 떠올랐다. 이를테면 정재훈의 <호수길>(2009), 원태웅의 <장 보러 가는 날>(2011), 오민욱의 <범전>(2015) 같은 작품이다. 이 중 최근작인 <범전>을 골랐다.

<개의 역사>는 감독이 살던 후암동 일대를 떠돌다 동네 슈퍼 아저씨의 도움으로 정착해서 살고 있는 한 마리 개(‘백구’)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는 영화다. 이 늙고 병든 개의 마지막 삶의 시기는 후암동 일대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과 겹쳐 있다. <범전>은 6.25전쟁 이후 60년간 주한미군부대 주변의 기지촌(‘남부끄러운 동네’)이던 범전동 일대가 2010년 부대 폐쇄와 함께 철거와 재개발 과정에 들어서게 된 것이 출발점이 된 영화다. 두 영화 모두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에서 시작된 작품이지만, 스타일(또는 ‘기질’)과 구성 방식은 극과 극처럼 다르다.

<개의 역사>의 촬영이 대부분 즉흥적이거나 자유롭게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범전>의 촬영은 정교한 계획과 조정의 산물로 보인다. 하나의 쇼트를 영화적 글쓰기의 한 문장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쇼트의 촬영 방식은 문체(styl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의 역사>가 일기 쓰듯 자유롭게 적어둔 문장들(때로는 그 순간의 감정을 잊지 않거나 반추하기 위해 휘갈겨 써둔 메모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범전>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정교하게 구성한 문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이 문체의 차이는 기질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뿐 미학적 우열의 평가 대상은 아니다). 이 기질 차이는 구성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두 영화는 모두 3부 구성을 취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구성 방식과 논리는 매우 다르다. <개의 역사>가 촬영 또는 편집 당시 감독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또는,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후암동의 백구, 홍은동의 할머니들, 그리고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 <범전>은 철저하게 대상이 되는 공간의 특징과 논리를 따라(또는 ‘사전에’) 구성되어 있다(동해남부선 남북에 자리 잡은 ‘돌출마을’과 ‘붉은 골목’, 그리고 양자를 가르는 철로의 ‘굉음’).

이 스타일과 구성 방식의 차이는, 2010년 전후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영화적 자기-성찰성의 두 가지 흐름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개의 역사>에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자기-성찰적인 질문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또는 아주 ‘소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개의 역사>는 영화를 찍으면서 마주친 다큐멘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적 편견에서 비롯된 질문들(‘왜 똑똑하지도 않은 개를 찍느냐’)에 대한 자신의 응답을 그 자리에서가 아니라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심스럽게 담아놓는다(같은 개의 아주 ‘영리한’ 모습을 발견한 다른 할머니의 말, 또 다른 증언, 또는 매스컴의 뉴스거리 선별 논리에 대해 질문하는 미디어 교육 현장 모습 등). 반면 <범전>은 매스미디어가 대상을 다루는 방식과는 철저하게 결별하겠다는 미학적(또는 영화사적) 자의식을 전경화하고 있다. 이 극과 극처럼 다른 두 가지 태도와 방식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양자 모두 세상과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의 논리를 비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의 역사>의 ‘소심한’ 항변의 태도, <범전>의 자의식적인 실험적 유희의 태도, 아마도 그 태도들은 시스템의 힘이 가장 포획하기 힘든 삶의 감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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