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영화]그 많던 멜로영화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국 멜로영화 다시 읽기

by.황희연(영화칼럼리스트) 2017-09-19조회 993
이것은 불가사의한 실종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영화계 주류 장르로 60년 넘게 명백히 한자리를 꿰차고 있던 ‘멜로’라는 장르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매달 25일 업데이트하는 ‘영화제작현황(www.kofic.or.kr 영화정보센터 영화제작현황)’을 아무리 꼼꼼히 들여다봐도 현재 개봉을 준비 중이거나 제작, 기획을 앞두고 있는 영화 중에 멜로영화 혹은 멜로 코드를 장착한 영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 5년간 멜로다운 멜로를 구경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생각해보면 한국영화계에서 멜로가 사라진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건축학개론>(이용주, 2011) 이후 국산 멜로영화는 한국 극장가에서 ‘단종’되었다. 코미디, 액션, 범죄, 판타지, 어떤 장르에나 멜로 코드를 습관적으로 갖다 붙이던 한국영화계의 진부한 버릇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남녀 간의 사랑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남자들의 ‘브로맨스’. 남자와 남자가 만나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끈끈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설정은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좀비처럼 끊임없이 나타나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한국영화계는 검찰과 형사, 기자, 소시민 외에 다른 직업군을 등장시키는 데 인색하고, 여성에게 주요 캐릭터를 부여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다. 그러니 이런 영화에서 남녀의 사랑이 싹틀 리 만무하고, 그리움이나 애틋함 같은 조용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시작된다. 그 많던 멜로영화는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큰 흥행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감성을 자극했던 <사랑하기 좋은 날>(권칠인, 1994)이나 <사랑을 놓치다>(추창민, 2005) 같은 멜로영화를 만나는 것은 이제 진짜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한국 사람들의 DNA에 각질처럼 남아 있던 멜로 편향적 정서가 모두 사라졌다고 우기기에는 TV 드라마 속 사랑의 닭살 강도가 제법 세다. 우리는 여전히 <구르미 그린 달빛>(KBS2, 2016)에 열광하고, <도깨비>(tvN, 2016~2107)의 판타지적 멜로에 마음을 빼앗긴다. 멜로드라마들이 IPTV 시대에도 20퍼센트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은 멜로라는 장르에 대한 우리의 편애가 아주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방증한다.
멜로영화가 사라진 시대, 멜로에 대한 우리의 편집증은 극장가에 기현상까지 만들어냈다. 재개봉 영화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는 게 극장가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고, 그 중심에 고전 멜로영화가 자리 잡았다. <노트북 The Notebook>(닉 카사베츠, 2004),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미셸 공드리, 2004), <첫 키스만 50번째 50 First Dates>(피터 시걸, 2004)에 이르기까지 이미 멜로 감성이 입증된 정통 멜로영화들이 한국 극장에 재등장해 크고 작은 흥행 실적을 기록했다. 이게 다 국산 멜로영화가 자취를 감춘 사이 우리 극장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계가 멜로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을 급속히 냉각시켜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이정국, 1997), <약속>(김유진, 1998), <클래식>(곽재용, 2002), <너는 내 운명>(박진표, 2005)으로 이어지는 신파 멜로와 <접속>(장윤현, 1997),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1998),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 2001),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 <싱글즈>(권칠인, 2003), <건축학개론>(이용주, 2012)으로 이어지는 감성 멜로,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이명세, 1990),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로 이어지는 로맨틱 코미디, <비트>(김성수, 1997), <늑대의 유혹>(김태균, 2004)으로 이어지는 청춘 멜로,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1995), <귀천도>(이경영, 1996), <비천무>(김영준, 2000), <중천>(조동오, 2006)으로 이어지는 판타지 멜로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에 멜로를 결합시켰던 한국영화계에 그간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이건 비단 한국영화계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리처드 커티스, 2003),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마크 웹, 2009)와 <비긴 어게인 Begin Again>(존 카니, 2013), <어바웃 타임 About Time>(리처드 커티스, 2013)까지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수시로 날아오던 사랑의 연서들도 요즘 들어 점점 자취를 감추는 분위기다.<라라랜드 La La Land>(다미엔 차젤레, 2016)나 <미녀와 야수 Beauty and the Beast>(빌 콘돈, 2017) 같은 뮤지컬 영화들이 그마나 멜로 코드를 장착하고 관객을 유혹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영화들은 전형적인 멜로라고 하기에 뭔가 이상하다. 이 영화들이 관객의 열광적 호응을 얻은 이유는 멜로 때문이 아니라 화려한 스펙터클 덕분이다.
확실히 멜로는, 점점 스펙터클의 경연장화하는 영화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감상하는 장르지 극장에서 체험하는 장르는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 기술 집약적인 영화에 사랑이나 행복 같은 아날로그 감성을 장착해야 하는 적절한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에 기대하는 건 단지 스펙터클이 아니라 기술 너머에 있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다소 진부해 보이는 멜로의 이름을 새삼 다시 불러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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