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명동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영화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망설임 끝에 영화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는 그렇게 영화배우 김지미의 첫 작품이 되었다. 이후 60여 년간 영화배우로, 제작자로 한국영화와 동고동락하며 살았다. 가끔 대중의 관심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참 행복했다고 느낀다. 영원한 스크린의 여왕 김지미와 영화평론가 조혜정이 마주 앉아 60여 년의 시간을 반추한다.
일시 | 2017년 5월 26일(금)
참석자 | 김지미 영화배우, 조혜정 영화평론가
기록 및 정리 | 이아림 「영화천국」 편집부
사진 | 김하영 포토그래퍼
조혜정 영화 <황혼열차>(김기영, 1957)로 데뷔하신 지 60년이 되었다. 당시는 한국에서 영화제작이 활발하지 않았고 배우도 많지 않을 때다. 김기영 감독님에 의해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 되어 영화계와 인연을 맺으셨는데 그때 기억을 듣고 싶다.
김지미 그때 작은어머니가 명동 시공관 옆에서 다방을 하셨다.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김기영 감독님이 집까지 따라와 영화 출연을 제의하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배우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언니가 <나라를 위하여>(안종화·서정규, 1949)라는 군사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집이 발칵 뒤집혔다(웃음). 내 경우에도 반대가 심했지만 언니의 영향이었는지 한번 해보자 싶었고 그게 평생의 일로 이어졌다.
조혜정 영화가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던 때는 아니었는데 여고생이 영화를 하겠다고 결정한 게 대단하다. 당시엔 연기 트레이닝도 받지 못했을 텐데 연기하는 게 겁나진 않았나?
김지미 김기영 감독님은 배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혼자 괴로워하셨는데 그걸 보면서 나도 시나리오를 보고 나름 연구하고 조감독과 얘기도 했다. 사실 얼마나 어설펐겠나(웃음). 그런데도 연기를 제대로 견줄 만한 영화가 없었으니 잘못했어도 인정해주신 것 같다. 그렇게 출연했는데 데뷔작 이후 쉴 새 없이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조혜정 출연작 수가 너무 많아 매체마다 수를 다르게 헤아릴 정도다. 많은 작품 중 대표작을 꼽아달라는 게 무례한 질문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인가?
김지미 사실 내 마음에 흡족한 작품은 없다, 전혀. 내 연기는 미완성이다. 완성될 수도 없고. 사람이 순간적으로 흡족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기 힘들 것 같다. 배역에 맞게 표현하는 것이 내 일인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흉내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어떻게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표현할 수 있겠나. 사실 부끄럽다. 연기생활 초기엔 많을 때 서너 편에 겹치기 출연을 해야 했다. 그중 한 배우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경우도 있었다. 이 촬영 현장에서 ‘철수’라 불렀던 사람을 다른 촬영 현장에서 ‘민우’라고 불러야 하는데 잘못 부른 적도 있고. 그때는 후시녹음을 하던 때라 그런 실수들은 더빙 때 바로잡기도 했다.
조혜정 그렇게 수많은 배역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김지미 사실 연기는 배우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몰두하느냐에 따라 배우의 연기도 달라지는 것 같다. 감독이 열심히 하면 배우도 따라가게 된다. 감독이 잘 안 풀려 끙끙댈 때 아무리 내색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그 고민과 노력은 배우와 스태프에게 전해지고, 그 고민을 터놓고 함께 나누면 배우도 영화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작품이 좀 더 잘되지 않나 싶다. 나는 감독이 조각가라면 배우는 그가 조각하는 재료라고 생각한다. 서로 호흡이 맞아야 영화가 잘될 수 있다.
조혜정 호흡이 잘 맞는 감독은 누구였나?
김지미 임권택 감독과 잘 맞았고 정진우 감독, <을화>(1979)의 변장호 감독과도 호흡이 괜찮았다. 서로 편한 분위기의 현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정진우 감독 같은 분은 잘 못하면 대놓고 ‘그렇게 해서 배우 하려고 하냐, 연기 그만둬라!’ 고 한다(웃음). 그럼 정신이 들지. 나도 욕 많이 먹었다(웃음).
조혜정 선생님도 그냥 계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웃음).
김지미 어쩌겠나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웃음). 감독이 나를 필요로 해서 갔는데 원하는 바를 100% 충족시킬 만한 연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조혜정 선생님이 데뷔하신 1957년은 한국영화계가 막 시작하는 시기였다. 영화제작 환경이 많이 열악했을 것 같다.
김지미 지금처럼 배우가 많지 않았다. 조미령, 최은희 씨 정도. 김신재, 이민자,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나온 양미희, 노경희 씨도 있었고. 어떻게 보면 혼자, 쉬운 말로 독주하다시피 했는데 내가 원했다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다. <식모>(민제, 1964)란 작품이 있다. 그 감독님도 당시 그렇게 유명하진 않았고 연세가 많았는데 그 영화를 꼭 제작해야겠다며 만삭이던 나에게 ‘그냥 해주시오, 난 돈도 없습니다. 도와주시오. 돈 벌면 개런티 드리겠습니다’ 하더라. 그래서 그냥 했다. 그땐 그렇게 출연료 없이 하는 작품도 많았다. 지금은 영화제작에 투자자들이 자금을 대지만 당시는 감독이 논밭 팔아서 영화를 만들었다. 거기에 배우도 응했고, 그래서 영화가 잘되면 다음에 또 작업하는 거지. 그때는 그게 통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열정이 대단했다.
조혜정 선생님은 스태프와 잘 어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장에서 ‘지미 아줌마’로 불린다는 얘길 듣고 정말 의외였다.
김지미 스태프들한테 늘 너무 미안했다. 몇 시간 찍으려고 현장에 가면 스태프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기다리며 고생하거든. 단역의 경우 한 컷을 찍기 위해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한다. 그분들이 있어 영화란 게 만들어지지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기억도 못 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찍었는데 혼자였다면 그 작품을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었겠나. 하루에 3~4편씩, 해 넘어가서 시작한 촬영이 새벽이 다 돼야 끝나는데 작품을 연구할 시간도 없었으니 주변 스태프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작품을 마무리할 수 없었을 거다. 스태프들 모두 한 식구다. 그 안에서 김지미란 배우가 탄생한 것이니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들의 힘든 생활을 많이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누구든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만큼 고마운 게 없으니까.
조혜정 개인적으로 <불나비>(조해원, 1965)에서의 연기를 좋아한다. 정말 아름다웠고 팜파탈 역할을 잘 소화하셨다. 좋아하는 이유를 돌이켜보면, 주인공 민화진이 남자들을 유혹하는데 불안하고 가녀린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들로부터 아주 영리하게 원하는 걸 얻고 끝까지, 굉장히 강인하게 간다.
김지미 비슷한 역할이 많지만 개중에도 그 영화가 좋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족하지만 연기도 마음에 어느 정도 차고. 어떤 작품은 부끄러움이 더 많아 ‘기능공이 찍어내듯 하는 연기’라고 말하기도 한다(웃음).
조혜정 <길소뜸>(임권택, 1985)에서도 많은 평론가가 상찬하는 연기를 보여주셨는데, 저는 그 작품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의 육성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늘 성우 옥경희, 정은숙 씨 목소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척 허스키하고 낮더라. 그런데 그 목소리가 영화에서 연기의 진정성을 살려준 것 같다. 성우의 목소리였다면 너무 윤기가 나서 가짜 같았을 텐데. 연기도 무척 좋았지만 목소리가 연기를 품어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지미 평생 아픔을 감추고 살아가야 하는 그 역할에 잘 맞았지. 목소리 칭찬은 처음 듣는데, 솔직히 나에게서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예쁜 목소리가 나온다면 얼마나 잔망스럽겠나(웃음). 그럼 김지미가 아니었겠지. 다 적절하게 갖추고 태어나는 것 같다.
조혜정 선생님 연기 중 강인한 캐릭터가 꽤 있다. <길소뜸>의 화영, <토지>(김수용, 1974)의 윤씨 부인, <티켓>(임권택, 1986)의 지숙 등이 그랬는데, 그런 역할에서 연기가 특히 빛나는 느낌이다. 실제로도 그런가?
김지미 그런 편이다. 휘지 않고 부러지는 성격이랄까. 적당히 타협하는 걸 잘 못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조혜정 한국 사회에서 강한 성격을 갖고 있으면 주변에서 별로 좋은 소릴 못 듣지 않나. 살아남기도 어렵고. 그런데 선생님은 영화계의 스타였고 본업인 연기를 통해 아성을 쌓았기 때문에 뒤따르는 비난 같은 것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지미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외모는 여성스러운데 성격은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침착한 데가 있다.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냉철함 같은 것도 있고. 상대방과 내가 교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찾으면 절대 누굴 버리지 않는다. 독하고 강하다고 표현되긴 하지만 정 많고 주변 챙기는 데 살뜰한 부분이 있으니(웃음), 서로 도와주지 않곤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조혜정 그에 비해 스캔들 관련해선 아픈 부분이 있으실 것 같다. 살아오면서 많은 대중에게 노출된 여배우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가혹하게 삶의 간섭을 받지 않았겠나.
김지미 나는 영화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았고 영화계에서 내가 받은 걸 다시 영화계에 투입하기도 했다. 영화계를 위해 앞장설 수 있는 일에 노력을 다했는데 단 한 가지 흉이 있다면 시집 여러 번 간 것밖에 더 있겠나(웃음). 남의 눈총을 받으며 살아가다 보면 쉽게 구설에 오르는 유명인이 많다. 사생활로 평가하는 건 그저 마녀사냥밖에 안 된다.
조혜정 1980년대에 들어서는 배우와 제작자를 겸했다.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계기가 궁금하다.
김지미 지미필름을 설립한 게 1986년이다. 당시 영화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세대교체가 되면서 기존 활동을 오래 한 영화인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검열이 심해 흥행만 원하는 영화가 많이 생산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설립했다.
조혜정 첫 작품이 임권택 감독의 <티켓>이다.
김지미 여러 일로 마음이 안 좋던 때 임 감독님과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영화 <티켓>의 소재를 얻었다. 다방에서 여관으로 커피를 시켰더니 배달 온 종업원이 빨리 마시라고 서두르며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면 티켓을 끊어야 한다고 하더라. 30분, 한 시간에 얼마라고 하는데 그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비용을 지불하고 그날 종업원으로부터 밤새 티켓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당시 한국 사회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를 알았지. 이걸 파헤쳐보자며 만든 영화가 <티켓>이다. 완성된 후에는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영화를 열두 군데나 들어내 개봉을 포기할 뻔했다. 그때가 1986년인데 문화공보부(現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서울올림픽(1988)을 앞두고 성매매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된다’고 하더라.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규제가 심하게 진행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조혜정 배우일 때와 제작자일 때의 입장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김지미 제작자가 되니 상업적인 부분을 고려하게 되더라. 그때는 영화사를 유지하려면 한 해 동안 제작해야 하는 ‘의무 편수’가 있었는데 그걸 채우기 위해 의식이 없는 영화도 찍었지.
조혜정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1984년에 제작 중단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 <비구니>가 33년 만에 부분 복원 상영됐다.
김지미 완성해서 작품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영화를 생각하면 여전히 속이 상한다. 당시 불교계에서 미안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10·27법난사태로 불교계에서는 정치권의 부당한 움직임에 긴장하고 있었고 그때 영화 <비구니>의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불교계를 폄훼하는 영화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종교계에서 <비구니> 제작 반대 집회를 열었는데 사실 여기엔 정치권의 불교 탄압 문제가 얽혀 있었다. 교계에서 정치권에 직접적인 문제 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던 거다. 제작자는 영화를 시작할 때 시나리오를 공보부와 사찰에 다 보내야 했다. 종교계 이야기를 하려면 종단의 허가를 받고 시작하는데 중간에 영화제작을 반대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는 사건이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혜정 한평생 영화계에서 배우·제작자·영화단체 대표 등 영화인으로 살아왔는데 소회가 어떤가?
김지미 이제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에 개인적인 미련은 없다. 다만 한국영화계가 잘 갔으면 좋겠다. 지금은 영화계가 일변도로 가는 것 같아 아쉽다. 여기엔 자본을 지닌 투자자들의 입김이 센 탓도 있는 것 같다. 우리한테 돈 버는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임권택 감독 같은 사람은 재미없어서 못 만들지. 영화는 다각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야 한다. 눈요기나 재미로만 치우쳐서도 안 되고. 청소년들의 정서에, 교육에 도움이 되는 영화도 필요하다. 제작자나 기업에서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루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게 후배 영화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다. 나는 정말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무척 행복하다. 한때는 그런 관심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행복이라고 느낀다. 아직까지 나를 인정하고 좋은 평가를 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