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팜파탈 영화배우 김지미 연대기

by.주유신(영화평론가) 2017-07-17조회 1,007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미(美)의 대명사였고 스크린 위에서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를 선보였으며 한국 영화사상 가장 치명적인 팜파탈을 연기한 여배우, 김지미. 그녀는 ‘영화계의 여장부’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수식어와 함께 가장 성공한 영화인 중 한 사람이자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영화계의 여왕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배우로서 김지미가 지닌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매력,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그녀가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과 그 어떤 스타보다 화려한 사적인 삶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당돌하고 오만한 요부형 여성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인성(personality)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매체이자 영화 속 의미가 새겨지고 캐릭터의 감정이 순환·통과하는 장소다. 하나의 개성적인 오브제로서의 몸 역시 마찬가지다. 몸의 형상과 무게감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욕망의 흔적 등은 몸 역시도 무한한 표현성의 장소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얼굴과 몸이 어우러지면서 한 개인 고유의 문화적 의미와 감각적 인상이 구성되고 그 인상 위에서 서사적 의미와 캐릭터의 감정이 조우하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으로서의 배우와 ‘유형’으로서의 스타는 하나가 되어간다.
뛰어난 미모와 입체적인 이목구비로 영화계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전례 없는 주목을 받았던 김지미는 고전적인 미인형이라기보다 도시적인 세련미와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서구적 미인형이었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균형 잡힌 몸매는 귀여우면서도 도전적으로 보이는 마스크와 어우러지면서 스크린을 장악하는 포토제닉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원작자인 정비석은 김지미를 ‘당돌하고도 오만해 함부로 접근하기를 불허함으로써 뭇 남성을 매혹시키는 요부형의 여성’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배우는 관객의 자기애적, 관음증적, 물신주의적 시선을 한 번에 받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고, 특히 영화 예술이 갖는 물신주의적 매력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김지미가 배우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은 근대화의 도정 속에서 공적 공간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들이 연일 극장가를 가득 메웠고, 스타는 이들에게 궁핍하고 어려운 현실을 잊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동일시하기 가장 좋은 대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어떤 여배우보다 많은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김지미는 한국영화의 상승기, 전성기 그리고 침체기를 관통하고 또 목격하면서,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과 대중의 무의식을 다채롭게 반영하거나 포착해내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가장 인상적이면서 깊이 있게 표현해낸 배우다.

극적인 데뷔, 홍성기 감독과의 인연 
김지미가 영화계에 데뷔하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극적이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57년에 여고 3학년이던 그녀는 원래 오빠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작은어머니가 명동에서 운영하던 다방에 들른 그녀는 우연히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었고 집까지 따라 온 김 감독에게 영화 출연을 제의받는다. 고민하던 그녀는 가족의 우려를 뒤로한 채 미국 유학 대신 배우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황혼열차>(1957)의 여주인공을 물색 중이던 김기영 감독에 의해 소위 ‘길거리 캐스팅’된 김지미는 아무런 연기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급작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김지미(金芝美)’라는 예명을 얻는다.
당시 영화계는 이미 최은희, 조미령, 문정숙 등이 주연급 여배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연극 무대나 악극단 등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연기의 베테랑들이었지만, 그 결과 그들의 연기 양식은 약간 과장되거나 양식화된 특징을 띨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어떤 연기 수업도 받은 적이 없고, 연기 경험도 없는 김지미의 약간 미숙하고 조용한 연기 스타일은 오히려 자연스럽거나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녀의 가련하면서도 도도한 이미지와 어우러지면서 파격적인 데뷔이자 신인 여배우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주목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출연작도 김기영 감독의 <초설>(1958)이었지만 참담한 흥행 성적을 거두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데뷔가 무색해지고 배우로서의 미래가 우려될 지경이었다. 그다음 작품은 당시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던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1958)였는데,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화면과 시원한 전개를 보여주던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여대생 역할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이 영화가 이전까지 최고 흥행작 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김지미를 둘러싼 모든 우려가 말끔히 불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계기로 ‘한국 멜로드라마의 황금 콤비’가 된 홍성기-김지미 커플이 탄생한다. 1958년 열아홉 살의 나이로 홍성기 감독과 결혼한 김지미는 이후에도 그와 지속적으로 성공작들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육체의 길>(조긍하, 1959)이나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박종호, 1959) 등 화제작에도 출연하면서 영화계 흥행의 보증수표이자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초특급 스타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연기의 전환 
김지미 영화 경력의 성공적인 출발점을 이루던 홍성기 감독과의 사적, 공적 밀월 관계는 1961년에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으며 곧 막을 내린다. 1961년 장안 최대의 화제는 단연 <춘향전>(홍성기) 대 <성춘향>(신상옥)의 대결이었다. 두 감독의 아내가 춘향 역을 맡으면서 ‘홍성기-김지미’와 ‘신상옥-최은희’라는 두 라이벌 커플 간의 사활을 건 경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8,000만 환이라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제작비 그리고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제작 등으로 인해 대중과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결과는 <춘향전>의 참패였고, 자존심과 명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큰 빚까지 안게 된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는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1962년에 서로 남남이 된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첫 번째 르네상스기인 1960년대는 김지미 개인에게도 전성기였는데, 그녀는 여배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가장 높은 개런티를 받았으며 가장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트로이카’로 불리던 문희, 남정임, 윤정희가 청순하고 발랄한 매력으로 각광을 받고 있을 때 김지미는 이들과 달리 좀 더 원숙한 이미지와 농염한 연기를 통해 독자적인 여배우의 계보를 그려나갔다. 또 ‘신성일-엄앵란’이라는 새로운 스타 커플을 탄생시킬 정도로 ‘청춘영화’가 드높은 인기를 끌던 시절에도, 김지미는 그런 흐름과 동떨어진 채로 좀 더 높은 연령대의 관객들을 겨냥한 멜로드라마는 물론이고 시대극, 미스터리영화, 액션영화 등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팔색조의 매력을 끊임없이 선보였다.
특히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은 <혈맥>(김수용, 1963)에서부터 김지미는 최고의 인기 배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연기에 대한 진지함과 자기 성찰을 보여준다. 이런 전환은 이후 김수용(<사격장의 아이들>(1967)), 이성구(<메밀꽃 필 무렵>(1967)), 신상옥(<대원군>(1968)), 임권택(<몽녀>(1968)), 김기영(<렌의 애가>(1969)) 감독 등의 문예영화 및 작가 영화들을 통해 또 다른 이미지와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창조해내는 성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트로이카 여배우들’에게 주연 역할을 넘겨주거나 그들과 모녀 관계로 출연하는 작품이 생겨나면서 세대교체의 흐름이 감지되었고, 이는 한국영화계가 불황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한 1970년대에 이르러 그녀의 활동과 경력 역시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스타 배우에서 영화계의 수장으로 
1970년대는 관객 수의 감소, 제작 편수의 급락, 작품 질의 저하가 악순환으로 이어지던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다. 1970년과 1971년까지 꾸준히 20~30편에 이르던 김지미의 필모그래피는 1972년에 10여 편으로 떨어지고 1973년부터 급속하게 줄어든다. 1975년까지 연간 두세 편에만 출연하던 김지미는 이후 약 4년간의 공백기를 보낸 후 <을화>(변장호, 1979)로 복귀한다. 여기에는 물론 ‘호스티스물’로 대표되는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하향적인 흐름이라는 객관적인 상황도 작용했지만 김지미가 40대라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사적인 삶에 굴곡이 생기면서 여러모로 불가피해진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오히려 그녀는 연기의 깊이와 폭을 넓혀가게 되었고 이는 국내외에서 이어지는 수상으로 보상을 받게 된다. 김지미가 10대에서 50대까지의 역할을 소화한 <잡초>(임권택, 1973)는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대지주 가문을 이끄는 여성 가장을 차분하고 위엄 있게 연기한 <토지>(김수용, 1974)는 제11회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13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만추>(이만희, 1966)의 리메이크작인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은 제1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후 배우로서 그녀의 행보는 마치 그녀가 출연한 홍파 감독의 영화(<외출>(1983)) 제목처럼, 2~3년에 한 번씩 스크린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외출’하는 모양새를 띠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시기에 그녀는 필생의 연기를 선보이며 두 편의 대표작을 만들어낸다. “비로소 목소리까지 찾은, 영화와 몸이 딱 붙는 순간”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표현처럼, <길소뜸>(임권택, 1985)에서 김지미는 분단 현실을 배경으로 모성을 억누르며 고통을 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분열된 자의식을 건조한 목소리와 복합적인 표정으로 체현한다. 그녀는 또한 항구도시의 다방 마담을 연기한 <티켓>(임권택, 1986)에서 잔인하고 냉정한 착취자의 이면에 자리 잡은 어두운 슬픔과 분노 그리고 처연한 광기를, 과잉과 절제 사이를 오가는 탁월한 연기 미학으로 묘사했다.
이 시기는 또한 그녀가 ‘지미필름’을 설립해 <티켓>을 비롯한 7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자신이 제작한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 1992)에서 배우로서 마지막 연기를 펼쳐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스크린쿼터 및 UIP 직배 등과 관련해 영화계의 수장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한다. 1997년에는 러시아국립영화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지미, 그녀의 자리 
그녀는 전쟁, 분단, 근대화로 이어진 한국 사회의 굴곡진 역사, 그 속의 수많은 혼란과 모순 속에서 격렬하게 부대끼고 살아가는 여성상을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연기했다. 그러나 그녀 안에 내재된 폭발적인 에너지와 숭고한 자존감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극단적인 윤리적 갈등과 깊은 실존적 고뇌 속에 던져놓음으로써 그녀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매혹적이면서 치명적인, 그래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이미지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또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영화계를 떠난 적이 없음을 그녀 스스로 자부하듯이, 김지미는 ‘최고의 스타’이자 ‘문화적 아이콘’을 넘어서서 무엇보다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과 열정으로 한 시대의 흐름과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가장 뜨겁고 과감하게 표현한 배우이자 모든 이의 연인이었다.
배우가 아닌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니 그녀가 없는 한국영화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고 삶 자체가 영화였던 그녀.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한국영화를 빛냈고 한시도 빠짐없이 한국영화와 더불어 호흡해온 그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팜파탈이던 그녀의 스크린 속 ‘이미지’는 스크린 외부에서 그녀가 펼쳐 보인 위선 없는 태도와 치열한 행보에 대한 ‘스토리’와 어우러져, 그녀를 많은 이의 뇌리 속에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스크린의 여왕이자 전설적인 배우로 남겨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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