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와 예술영화 사이, 해방기 한국영화의 선택 이규환의 <해연일명: 갈매기>(1948) (해방기 | 1946~1950년)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7-05-10조회 1,719
해연

해방공간의 영화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감격에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직접 그린 태극기가 방방곡곡에 물결쳤다. 조선의 영화인들 역시 그 기쁨을 함께했는데,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해방의 감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물론 그들은 일제강점기 말 유일한 영화사이자 국책영화사였던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소속이었고, 카메라 역시 ‘법인 조영’의 광희동 촬영소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영화인들이 기록한 영상들은 <해방뉴스> 시리즈로 공개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어지럽게 진행된 좌와 우의 갈등은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법인 조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영화건설 본부가 1945년 9월 24일 창립됐고, 11월 5일에는 좌익 영화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됐다. 12월 6일에는 두 조직이 해산하며 합쳐진 조선영화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은 영화인들의 좌우 분열과 통합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각 조직의 면면을 들여다본다면 인력과 기술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영화 제작 환경의 특수성을 읽어낼 수 있다. 지도부 외 구성원들은 좌우익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친일 부역 문제나 좌우익 갈등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조선영화계의 생존 그 자체였다.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은 미국영화의 범람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시점의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98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온 ‘중배’의 조선사무소가 미군의 보호를 받고 있어 미군정 소속인지 알았다는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 기관이었던 중배는 해방기 남한에서 미국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의 첨병 역할을 했다. 같은 기간 조선 극영화는 17편에 불과했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 제작의 기본이라 할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극영화 만들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영화 장면을 활용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16mm 필름에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들이 성행할 정도였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mm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 1949), 16mm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이 대표적이다.

‘예술영화’라는 지향과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현실

영화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완성되었고,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영화로 인정받으며 11월 21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단체에서 수입을 진행한 덕분에, 국내에서는 사라진 필름이 2014년 9월 고베영화자료관에서 발굴되었고, 개봉된 지 60년도 훌쩍 지난 시점인 2015년 7월에 다시 공개되었다. <해연>은 여러 의미에서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예술영화사는 동인제 성격의 영화사로 프로듀서 이철혁, 각본 이운룡 등 구성원 대부분이 연극 무대 출신이었다. 한편 촬영 현장은 김동규 등 배우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감독 데뷔한 이규환이 연출을 맡았고, 촬영 양세웅, 녹음 이필우, 조명 고해진 등이 참가했다. 애초 <해연>의 감독을 맡기로 한 이는, 일본 도호영화사 출신으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법인 조영’의 전신)에서 국책영화 <우러르라 창공>(1943) 등을 연출한 김영화였다. “해방 후 3년간 자중하고 있던”(「예술영화」, 14쪽) 그가 과도정부 영화 과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규환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영화 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규환은 <똘똘이의 모험>(1946. 09. 07. 개봉), <민족의 새벽>(1947. 04. 21. 개봉), <그들의 행복>(1947. 12. 02. 개봉)을 연이어 개봉하며 해방기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제 말기 법인 조영에 참가하지 못해 평택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이후의 활발한 활동 배경에는 일제 협력에 대한 부채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개인의 판단과 영화계의 일치된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연>의 제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술영화사가 이 영화의 착수 시점과 완성 시점에 잡지 「예술영화」와 「해연」을 각각 발간했다는 점이다. 영화사의 명칭 그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미국영화가 범람하고 ‘영화다운 영화’는 제작되지 못하는 해방기 상황에서, ‘예술영화’의 이론적 고찰과 실천을 모두 겨냥하며 잡지/영화를 동시에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롯이 예술영화로만 수렴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는 바로 그때, 영화 역시 다른 매체들과 발맞춰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노선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의사 안중근>(이구영, 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 1947) 등 일제강점기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안종화, 1948) 등 ‘경찰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한국’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몽타주와 할리우드 스타일의 공존

기본적으로 <해연>은 건국 도상의 조선 사회와 민중이 체현해야 할 가치들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혼란한 정국을 틈타 모리배 짓을 일삼는 철수(박학)와 헤어지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사명으로 감화원 선생을 맡기 위해 떠나는 정애(남미림)의 모습이 압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영화는 불량소년들을 모아 계도하는 감화원(실제 촬영은 부산 수영소년학교)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민 만들기를 묘사한다. 그리고 계모 때문에 가출해 불량소년이 된 수길과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를 찾아온 정숙(조미령)이 남매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통해 대중을 위한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식민지 영화감독 이규환이 연출한 <해연>이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해방 이전 조선영화의 영화문법을 대표하는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와 해방 이후 미국화를 상징하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의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자는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의 노동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시나리오의 “괭이로 파는 소년, 삽으로 흙을 떠 던지는 소년들! / 박선생과 정애도 같이 일을 한다 / 정애의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땀방울! / 소년들의 합창소리! / 하늘에 나는 갈매기! / 멀리 반짝거리는 황금빛 바다물결!”이라는 문자는, 영화에서는 웅장한 남성합창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선생들과 원생들이 황무지에서 곡괭이질하는 모습과 세찬 파도의 쇼트가 리듬감 있게 병치되는 것으로 영상화된다. 감독의 예술성과 국가 건설이라는 키워드가 몽타주 기법으로 만난 것이다. 한편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이 영화 전반에 안정적으로 구사되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고전 할리우드 방식의 ‘몽타주 시퀀스’ 기법을 활용해, 수길이 공중으로 핸드백을 던지는 쇼트에 바로 이어 빠른 음악과 함께 해방 후 대도시 서울의 타락한 풍경과 소매치기 소년으로 변해버린 수길의 모습이 속도감 있는 쇼트들로 배치되는 장면이 그렇다. 완성도를 별도로 하자면, 영화의 말미 떠나는 정숙과 따라가는 수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할리우드 스타일의 교차편집을 이용한다. 이처럼 이규환은 이 영화가 처한 정치적 기반에 동의하면서 예술영화 운동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해연>은 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도 ‘건국 프로파간다’ 서사의 자장 속에 머무른다.

해방기에서 6·25전쟁기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한 것이 크게 평가 받는 등 <해연>이 개척한 예술성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푸른 언덕>(유동일, 1949)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1948~49년 한국영화계는 매해 20편의 극영화를 내놓으며 제작 환경이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닥쳐왔다. 6·25전쟁의 발발로 모든 영화 제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1·4 후퇴 이후 국방부 촬영대 등 군관의 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간다. 1952년 이후 피란도시 대구 등지에서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 같은 극영화도 제작되고 극장에서 개봉되어, 피란지 관객들이 전쟁의 아픔과 고단한 일상을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기반은 이때 마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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