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체제로의 진입, ‘아동영화’라는 선택 일제강점 말기 | 1940~1945년 | 최인규의 <수업료>(1940)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7-03-09조회 1,705

조선영화 제작 지형의 변화

1937년 이후 조선영화계는 발성영화 제작 기반이 안착되었고, 제작 지형도 전례 없는 활기를 띠게 된다. 이른바 ‘조영(조선영화주식회사)’과 ‘고영(고려영화협회)’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제작사와 산하의 스튜디오, 그리고 이를 운용하는 프로듀서가 등장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제작 기반이 갖추어졌고, 일본 ‘내지’ 영화계와의 협업이 타진되고 또 실현되는 등 제작과 배급 영역도 조선영화계라는 범위를 넘어섰다. 조선영화계와 주요 일본영화사와의 합작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성봉영화원·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의 <나그네/다비지 旅路>(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이규환, 1937)에서다. 조선 측이 연출 등의 인력과 로케 비용을, 일본 측이 카메라와 후반 작업을 맡았다. 영화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내지’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조선의 향토색을 담은 조선어 토키에 일본어 자막을 달아 공개해보니, 재일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객들도 호응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화를 제작할 조선의 프로덕션과 이를 배급하는 일본의 영화사가 공히, 이른바 지식인층이 관객인 일본의 유럽 예술영화 시장에 조선영화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를 찾아낸 것 같다. 미약하나마 상업적 가능성을 본 셈이다. 이후 일본 ‘내지’ 시장을 겨냥해 조선의 로컬 컬러를 내세운, 성봉과 도호 합작의 <군용열차>(서광제, 1938), 반도영화제작소가 제작하고 도와상사가 후반 작업을 지원한 <한강>(방한준, 1938) 등이 연이어 소개되었지만, 유의미한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애초 상업영화로서 성공하기 힘든 영화들이었던 데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영화들과 어깨를 겨루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40년을 전후해 일제의 전시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제작·배급·상영 전 분야에 영화 국책이 시행되면서, 조선영화계 역시 다시 요동치게 된다. 조선영화도 제작 방향을 다시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영화계와의 협업이라는 제작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향토성이라는 기존의 스타일을 넘어서는 새로운 소재를 찾아 나서게 된다. 조선의 풍경을 전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국의 관심을 끌 만한 시의적인 주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조선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와의 교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지’ 당국의 의중을 살펴야 하는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1939년 <국경>으로 데뷔한 최인규가 두 번째 작품 <수업료>(1940)와 세 번째 작품 <집없는 천사>(1941)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이러한 조선영화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아동영화 <수업료>의 제작과 공개

<수업료>는 한 조선 어린이의 작문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은 당시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北町公立尋常小學校) 4학년생이던 우수영 군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소학생 대상 신문인 「경일소학생신문(京日小學生新聞)」 공모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상(學務局長賞)을 받은 동명의 작문이다. 가정 형편상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광주의 소학교 학생이 돈을 구하러 숙모가 사는 장성까지 걸어가 돈을 구해 오는데 반 친구들 역시 돈을 모아주었다는 이야기다. 고려영화협회의 이창용은 1939년 3월 우수영 학생의 작문이 선정되자마자 일본영화계의 중견 시나리오 작가 야기 야스타로(八木保太?)에게 시나리오를 맡긴다. 일본 ‘내지’ 시장에 통할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영화 식의 시나리오를 취하는 편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연출과 촬영은 안정 구도에 오른 조선영화계에서 맡고, 역시 취약했던 후반 작업과 ‘내지’ 개봉을 위한 일본어 자막 작업(superimpose)은 일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일본영화인의 초빙은 시나리오뿐만이 아니라, 주요 출연자인 다시로(田代) 선생 역의 스스키 다겐지(薄田?二)와 영화음악의 이토 센지(伊藤宣二) 등이 참가해 제작 초기부터 ‘내지’ 영화계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 물론 영화화를 위한 연출은 조선인 감독의 몫이었다. 흥미롭게도 <수업료>는 촬영 후반부 최인규의 와병(한 증언에 의하면 연인 김소영과 헤어진 쇼크)으로 감독을 방한준으로 교체, 결국 공동 연출이라는 크레디트로 마무리되었다. 영화는 무난히 검열을 통과하고 1940년 4월 30일 명치좌와 대륙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해 흥행으로 안착했다. 조선에서의 순조로웠던 과정에 비해, 이창용이 애초 기획한 일본 개봉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아동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부성에 의해 ‘비일반 영화’로 인정(認定)되었는데, 일반용 영화가 아니라는 말은 “14세 미만은 보지 못하는 영화”라는 의미다. 문부성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조선에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묘사되는 영화를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조선인 소학교는 일본 ‘내지’와 조선의 일본인 학교와 달리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영화는 몇 번의 시사회만 진행한 채 결국 정식 개봉에는 실패한다.

텍스트의 균열된 틈새가 발화하는 것들

<수업료>는 조선어가 발화될 때에는 일본어 자막이 있고, 일본어가 발화될 때에는 조선어 자막이 없다. 제국의 언어에 부합한 식민지 영화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어 자막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지’의 입장에서는 외국영화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선영화’라는 텍스트는 일제 식민지라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제작 환경에서 이창용은 ‘내지’ 시장에도 통하는 영화를 기획하며, 야기 야스타로에게 일본어 시나리오를, 최인규에게 촬영대본과 영화화를 맡겼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극작가 유치진이 쓴 한국어 대사로의 변경 과정이 있었다. 확실한 것은 영화화된 <수업료>에는, 그것이 최인규의 의도였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것이었든, ‘반일적 효과’로 해석되는 지점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반드시 수업료를 내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국책적 프로파간다의 의미보다는, 식민지 조선에서 가난으로 인해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어린 소학교 학생의 상황이 부각되고 있다. 친절하지만 조선어를 잘 모르는 일본인 담임선생에게 겨우 기침을 멈춘 할머니가 “어린 것이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조선어로 힘겹게 말하는 영화의 장면은, 일본어만의 대화가 실린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묘사인 것이다. 또 극중 영달이 수업료를 구하기 위해 즉 학교에 다시 가기 위해, 수원에서 평택 큰어머니 댁까지 60리 길을 걸어가는 것은 원작의 ‘인고단련’의 경험을 옮긴 것이지만, 영화는 학교에서 배운 ‘애마진군가’를 부르고 나서도 결국 울어버리고 마는 영달의 얼굴을 덧붙인다. 이러한 것들이 최인규의 연출이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빚어낸 것들일까. 아니면 결국 제국이 원하는 대로 작동되지 않는 식민지적 현실이 영화에 반영된 결과일까. 이러한 단서는 <집없는 천사>에서도 발견된다. 영화는 경성의 부랑소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한 향린원(香隣園) 방수원(方洙源)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촉탁이었던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가 방 목사의 수기를 각색해 시나리오를 썼고, <수업료>와 마찬가지로 최인규의 연출을 거치며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영화는 여러 번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몽의 주체가 기독교의 목사이자 식민지인 방성빈(方聖貧)이라는 점이 지워지지 않았다. 말미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황국신민서사 제창 신도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상당히 이질적이다. 또 역사학자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의 흥미로운 지적처럼, 이는 최인규가 연출보좌(演出補佐)로 참가한 <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다다시[今井正], 1943)로도 이어진다. <집없는 천사>에서 배우 김신재(최인규의 부인)가 분한, 의사가 되겠다는 고아 소녀 명자는 <망루의 결사대>에서 경성에서 의대를 다니는 영숙으로 이어진다. 영숙이 의대를 졸업해 ‘여의사’가 된다면, 마을의 여성 중 가장 상위계급을 차지하고 있는 다카즈 경부보의 아내 요시코(하라 세쓰코[原節子])의 자리를 넘게 되어, 민족적 위계(ethnic hierarchy)가 전복될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친일 국책영화에서 ‘해방영화’로

1942년 9월 29일 조선영화 제작계는 단 하나의 국책영화사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합되었다. 일제 말기 최인규는 이 ‘법인 조영’에 입사해, 군국주의 논리를 옹호하고 선전하는 국책영화 감독으로 영화 작업을 이어나간다. 원래 고려영화의 기획이었던 <망루의 결사대>에 기획, 연출보좌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과 맹세>(1945)를 연출했다. 광복 이후 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자유만세>(1946), <죄 없는 죄인>(1948), <독립전야> (1948) 등 이른바 광복을 다룬 영화 3부작을 만들었고, 미공보원 제작의 <국민투표>(1948), <장추화 무용>(1948), <희망의 마을>(1948) 등 3편의 문화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으로 이어지는 최인규의 필모그래피는, 단순히 한 식민지 예술가의 욕망과 그 변명의 차원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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