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으로 완성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토키 양주남의 <미몽>(1936)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7-02-24조회 4,752
미몽

조선 영화계, 토키(talkies)를 모색하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발성영화는 어떤 존재였을까. 1930년 초부터 서구의 토키들이 경성 극장가에서 상영되기 시작했지만, ‘말하는 활동사진(talking pictures)’이라는 진정한 충격은 조선말과 만나면서였을 것 같다. 1935년 10월 4일 조선의 첫 번째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이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서투르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조선어가 화면에 움직이는 조선인의 입에서 들리는 것이 마치 양요리에 질린 사람에게 김치 맛이 정다웁 듯” (「동아일보」, 1935. 10. 11)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사실 조선어 토키 제작이 <춘향전>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조선 영화인들은 조선어 토키를, 무성영화로는 더 이상 활기를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던 당시의 조선 영화산업을 일시에 부흥시킬 프로젝트로 생각했다. 조선어 토키를 제작하려는 여러 시도 중 대표적인 것은,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나운규와 조선인 최초의 촬영기사 이필우가 만난 ‘원방각사’에서 1930년 제작을 시도한 <말 못 할 사정>이다. 이필우는 디스크 녹음 방식(sound-on-disc)의 파라마운트 발성영화를 본 후,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디스크에 녹음하는 방식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해 처음 토키에 착수한다. 결국 영화의 제작은 마치 그 제목처럼 무산되었지만, 이후 이필우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하이, 그리고 조선을 오가며 토키 녹음 시스템의 개발에 몰두했다. 1935년 첫 번째 토키에 성공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조선 영화인들의 고군분투 역시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경성촬영소의 ‘협업(協業) 시스템’

토키 <춘향전>을 시작으로, 조선영화계의 초창기 발성영화 장을 주도한 것은 경성촬영소다. 그 역사는 결코 짧지 않은데, 1930년말 경성 흥행계의 실력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朗)가 대일본영화흥업회사를 설립하며 부속 스튜디오로 만든 것이었다. 본격적인 영화제작은, 1931년 일본영화의 시대극 배우 도야마 미쓰루(遠山滿)가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촬영소에 원산프로덕션을 설립하면서부터다. 그해 여름부터 경성촬영소는 2부 조직으로 운영되는데, 1부의 현대극은 원산프로덕션이, 2부의 시대극 제작은 신흥프로덕션(감독 김상진)이 맡았다. 도야마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선전 영화 등으로 제작의 명맥을 잇던 경성촬영소는 1932년 6월경에 쇼치쿠키네마(松竹キネマ)의 교토 스튜디오 소속 감독인 야마자키 후지에(山崎藤江)가, 이어 1933년 여름 이필우가 토키 연구를 끝내고 합류하며 재출발하게 된다. 1934년 10월경에는 경성부 본정 3정목에 새로운 스튜디오도 설립했다. 영화사가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초판 1969년)로 대표되는 기존의 영화사 서술은, 경성촬영소의 재건과 토키 <춘향전>을 성공시킨 주체로 이필우·명우 형제만을 부각하지만, 사실 경성촬영소의 토키 작업은 조선 영화인과 일본 영화인의 협업 체제로 이루어졌다. 조선인 기술 인력인 이필우와 이명우뿐만 아니라, 일본인 감독 야마자키 후지에(조선에서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와 조선 이름 김소봉으로 개명)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하는 핵심 인력이었다. 특히 <춘향전>의 토키 녹음에는, 이필우가 일본에서 만난 나카가와 다카시(中川史)가 참가했다. 그는 교토의 에토나(エトナ) 촬영소에서 활동하던 녹음기사로, 이필우의 요청으로 자신이 만든 녹음 기계를 들고 조선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가 개발한 나카가와식(中川式) 토키, 즉 ‘N. T 시스템’은 <춘향전>에 사용되며 ‘조선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이필우의 개선작업을 거치며 이후 경성촬영소의 토키 녹음에 계속 사용됐다. 이들 외에도 양주남이 조감독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김소봉과 이필우의 도제로 영화를 배우다, 경성촬영소의 다섯 번째 토키 <미몽>(1936)으로 감독 데뷔하게 된다. 「삼천리」 1940년 5월호 등의 사료가, <미몽>의 연출을 양주남·김소봉의 공동 감독으로 기록하기도 하는 것처럼, 경성촬영소의 진용은 조·일 영화인들의 협업과 도제 시스템으로 구성됐다. 한편 양주남은 <미몽> 이후 감독이 아닌, 녹음과 편집 등 기술 파트에서 일했고, 광복 후에는 주로 편집 기사로 일하면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걸쳐 <종각>(1958) 등 5편의 극영화 연출작을 남겼다.

식민지판 ‘자유부인’ 애순의 세상 편력
2005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된 <미몽>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토키 작품이다. 식민지 여성의 일탈과 위태로운 애정 편력, 그리고 처벌을 다룬 이 영화는, <미몽 迷夢>이라는 제목처럼 주인공 애순이 꾸는 잠깐의 단꿈(반어로서의 ‘스위트 드림’) 혹은 헛된 꿈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처마 끝에 걸려 있는 새장 속의 두 마리 새를 보여주는 쇼트로 시작한다. 이어 부부가 있는 안방의 평화로운 모습은, 남편 선용과 부인 애순의 말다툼이 시작되며 분위기가 반전된다. 선용은 애순의 잦은 외출과 쇼핑을 나무라고, 애순은 자기는 “조롱에 든 새”가 아니라고 맞받아친다. 쇼핑을 간 애순은 ‘데파트’에서 창건을 만나고, 집을 나와 그와 함께 호텔에서 생활한다. 세탁소 점원이라는 창건의 신분과 강도 행각을 알게 된 애순은 공연에서 본 무용수를 쫓아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간다. 기차를 놓쳐 다시 용산역으로 서둘러 가던 택시는 공교롭게도 애순의 딸 정희를 치게 되고, 죄책감을 느낀 애순은 병실에서 약을 먹고 자살한다. 영화학자 이효인이 이 영화를 ‘일본의 정책(선만교통타임즈)-일본인 투자(와케지마 슈지로)-조선 인텔리들(작가 최독견 등)의 동조’라는 차원에서 분석한 것처럼, 확실히 <미몽>은 식민지 남성 계급이 주도하는 계몽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당시 관객들에게 스크린에 비치는 애순의 모습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영화는 백화점에서의 양복 쇼핑, 호텔 방에서의 숙식, 현대무용 공연 관람 등 서구/일본식 근대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애순의 행보를 통해 식민지 자유부인의 매혹적인 일탈을 보여주면서도, 마지막은 가부장적 질서에 따른 비난과 처벌의 서사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조선 영화인들이 일제당국, 그리고 자본과 협상하는 과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상업적 노선에 주목해 본다면, 또 다른 흥미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발성영화의 화법

이 영화는 탈선한 부인의 처벌이라는 서사에 ‘교통영화’라는 정책적·계몽적 외양을 띠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상업영화의 대중적 화법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스타일적으로도 그렇다. 유사한 사물을 이용해 쇼트와 쇼트를 연결하던 조선 무성영화의 화법은 토키 <미몽>으로도 이어지는데, 덧붙여 인물들의 대사 같은 사운드 요소까지 장면의 연결에 활용된다. 예컨대 애순과 창건이 처음 만나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바의 음악 소리와 함께 남편 선용이 혼자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식이다. 또 딸 정희가 잠꼬대로 어머니를 찾으면 호텔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애순의 모습이, 창건이 웃는 소리가 선용의 웃음소리로, 선용이 친구와 정희 얘기를 하면 정희의 장면이 이어져 나온다. <미몽>은 1936년 시점의 조선영화가 무성영화 시기의 신파 영화에서 일본식 멜로드라마 영화로 이행하는 시기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사운드로만 처리되는 이 영화의 격투 장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파 영화의 활극적 요소들(특히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가 보여주던 날것 그대로의 싸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문예봉이 분한 애순의 애정 행각과 결말부 클로즈업으로 강조되는 그녀의 반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파 영화의 활극적 요소들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조택원이 분한 무용가가 평양으로 떠나자 그가 탄 기차를 택시로 추격한다든지, 클라이맥스에서 여주인공의 자살, 그리고 난데없는 권총의 등장이 특히 그렇다.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는 신파적 정서와 스타일이 거의 퇴색되고, <나그네 旅路>(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이규환, 1937), <한강>(방한준, 1938) 등 조선의 ‘로컬 컬러’를 강조한 영화와 고려영화사의 <수업료>(최인규·방한준, 1940),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처럼 당국의 정책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전환됐다. 우직한 주인공이 일본식 근대를 상징하는 자본가 계급의 모던 보이를 맨주먹으로 응징하는 카타르시스는 더 이상 조선 관객들이 누릴 수 없었다. 조선영화가 전시체제로 진입하던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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