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관객의 가슴을 겨눈 신파영화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1934)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7-02-24조회 2,986
청춘의 십자로
1930 – 1934 신파영화의 출발과 형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파(新派)는 언제부터 한국영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비극을 염두에 둔 과잉된 감정 묘사, 특히 과장된 눈물 연기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신파적’이라는 수사로 비하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신파성은 상당히 복잡한 개념이며, 그것이 영화사에서 논의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신파와 딱 들어맞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 매체에서 신파의 어원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초창기 일본영화사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영화는 구극(시대극)과 신파(현대극)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명확히 나뉘어 제작되었다. 그 이유는 무대극인 가부키와 신파극에서 각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3년 10월 도쿄의 닛카쓰(日活) 무코지마(向島) 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닛카쓰의 영화 제작 인력이 교토와 도쿄로 분할되었고, 이는 일본영화의 두 가지 유형인 구극(교토에서 제작)과 신파(도쿄에서 제작)가 분리되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원작으로 만든 무성영화 <카추샤 カチュ?シャ>(1914)가 닛카쓰 무코지마 촬영소의 첫 히트작이었고, 이어 신파 비극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꼽히는 <곤지키야샤 金色夜叉> <불여귀 不如?> <나의 죄 己が罪> 등이 영화화되었다. 1917년 이후 일본영화계에 연극의 영향에서 탈피하자는 ‘순영화극운동(純映?劇運動)’이 일어나면서 신파영화 는 더 이상 현대극(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을 의미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써 구극과 신파는 각각 시대극과 현대극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현대극은 정극 혹은 인정극으로 불린 연애 비극과 활극이 장르적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영화사가 야마모토 기쿠오(山本喜久男) 역시 지적하듯이 일본 현대극의 형성에는 서구영화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데, 구체적으로 일본과 조선에서 ‘청조(靑鳥)영화’라고 불린 미국 블루버드 영화사의 멜로드라마와 <명금 The Broken Coin>(프랜시스 포드, 1915)을 위시로 한 연속활극영화의 영향이 컸다(「일본영화에 있어 외국영화의 영향-비교영화사 연구」, 와세다대학출판부, 1997, 86쪽).

조선의 신파영화

초창기 일본영화사를 다소 길게 검토한 이유는, 일본 신파영화들이 식민지 조선의 극장가에서도 상영되었고, 조선 영화인들의 영화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규설이 감독한 <농중조 籠中鳥>(1926), 이경손이 감독한 <장한몽 長恨夢>(1926)과 <춘희 椿?>(1928) 등이 일본 신파영화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특히 <장한몽>은 우리에게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장한몽」이 원작이고, 이는 일본 대중소설 「곤지키야샤」를 번안한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조선의 영화평에서도 신파영화는 동 시기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대극이 아닌 영화 유형, 즉 현대극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신파 비극, 신파 활극 같은 명명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즉 조선의 신파영화 역시 ‘신파=현대극’이라는 일본의 어원을 반영하고, 비극(연애극, 인정극), 활극 등 여러 장르적 요소가 녹아있는 형태였다. 「활동사진필름검열개요」(1931)에서 <장한몽>과 <농중조>의 장르를 공히 현대극, 연애극, 비극으로 기재한 것에서도, ‘신파/비극’의 본래적 어원과 개념을 추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파 개념은 <농중조>의 서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집안에서 정한 남자와의 결혼에서 비롯된 여주인공의 비극(정신병, 자살의 암시), 연적들의 ‘화양식(和洋式) 격투’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카페 신의 활극,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인 나운규가 보여주는 희극 장면 등 현대를 배경으로 여러 장르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또 신파적·서구영화적 요소가 모두 담긴 <아리랑>(나운규, 1926)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빚 독촉으로 여주인공이 겪는 고초, 격투와 살인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바로 <아리랑>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는 <유랑>(김유영, 1928) 등의 카프 영화에서 반복되고, <승방비곡>(이구영, 1930) 같은 오락 영화를 통해 줄곧 변주되었다.

식민지 청춘들의 슬픔과 분노, <청춘의 십자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최고(最古)의 한국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는 이러한 신파영화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감독 안종화는 그 자신이 신파극단의 여형(女形) 배우 출신으로, <해의 비곡>(왕필렬, 1924) 등의 주연을 거쳐 1930년 <꽃장사>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 두 번째 작품 <노래하는 시절>을 연출했고, 1934년 <청춘의 십자로>를 내놓으며 감독으로 주목받는다. 그는 전작에 이어 직접 각본을 쓴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 “조선 최초의 갱영화”(동아일보, 1936. 2. 5) <역습>(1936)에 이어 <인생항로>(1937)로 식민지기의 필모그래피를 마무리했다. 한편 1938년 조선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 영화제가 개최되었는데, 무성영화 부문 베스트 10 중에서 안종화의 <인생항로>가 3위, <청춘의 십자로>가 6위를 차지했다. 그의 영화가 대중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청춘의 십자로>는 그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서로 얽혀 있지만 엇갈리고 결국은 다시 조우하는 청춘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선술집의 영복(이원용)이 술에 취해 사과를 발로 차는 장면과 개철(박연) 일당의 술자리에서 양복 상의가 사과를 덮는 장면(영옥의 겁탈을 암시)을 연결하며, 서울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영복과 영옥(신일선) 남매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 계순(김연실) 집의 빚 때문에 개철에게 구타를 당하고 나온 영복과 명구(양철)에 의해 개철의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계순이 엇갈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개철의 집에서 빠져나온 계순이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 그녀가 겪은 고초를 영복에게 얘기하고, 그는 복수를 위해 개철을 찾아간다. 영화 내내 희극적 요소를 가미하던 영복의 친구들(최명화와 희극배우 이복본)도 마지막 격투의 현장으로 따라나선다. 영복이 개철의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름 아닌 누이동생 영옥이 있었고, 그간의 사정을 나눈 둘은 끊임없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처럼 안종화는 영복의 복수 장면에서, 그리피스 식의 교차편집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감정을 한층 더 증폭해 격투 신으로 연결한다. 자신과 애인과 여동생을 위한 복수가 펼쳐지는 곳은 개철과 명구가 개최한 화려한 피로연 자리다(실제 이 클라이맥스의 격투 장면은 당시 서울 3대 요정의 하나인 국일관에서 촬영했다). 개철에게 사정없이 주먹을 날린 영복의 복수가 끝나고, 이제 영복과 영옥과 계순은 함께 살게 된다. 영복과 계순이 각자의 직장으로 향할 때 영옥이 천주교식의 십자 성호를 그으며 그들을 축복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그들의 새로운 출발이 암시된다.

신파적 리얼리즘

“그는 화려한 장면을 좋아해서 어느 때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꾸며내는 때가 있다”(「조선일보」, 1936. 2. 29)라는 당시 안종화에 대한 평가처럼, <청춘의 십자로> 속 영복과 친구들의 복장은 수하물 운반부라고 하기에는 비현실적으로 깔끔하고(영복의 운동화를 보라), 더구나 영복은 선술집에서 바나나를 먹기도 한다. 카메라 시점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카페에서 개철 일당은 상표가 선명한 일본 맥주를 마시고, 자동차를 타고 골프를 치러 다닌다. 물론 이 장면들은 당시 조선 관객들을 위한 영화적 볼거리(spectacle)였을 것이다. 안종화가 대중영화적 표면을 장식하는 것에 몰두했다고 해서 식민지 조선의 정서적 현실마저 거부한 것은 아니다. 지주 아들 명구와 모던보이 개철의 악행, 자본가 계급에 의해 겁탈당하는 누이동생과 애인의 비극, 클라이맥스의 격투를 통한 복수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조선 관객의 정서를 정확하게 건드렸을 것이다. 바로 <청춘의 십자로>가 안종화의 최고 흥행작인 이유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힘든 상황에서, 조선의 풍속을 담은 농촌과 향락적인 도시의 대비,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대비와 그 사이에서 곤욕을 치르는 누이동생이라는 설정은, 조선영화가 식민지 현실을 그리는 한계치였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조선영화의 무성 시기는 저물어갔고, 더 이상 조선어간자막(intertitle)이 필요치 않고 조선말이 직접 스크린에서 들리는 발성영화(talkie)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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