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La roue",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미처 1분이 넘지 않은 상영시간으로 시작한 영화의 상영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의 예술인 영화에서 상영시간은 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이유로 무한정 길어질 수 없었다. 대중들이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그걸 허락할 수 있는 영화관의 상영시간은 관객의 노동시간과 휴식 사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락의 정치경제학 시간 안에서 (영화 산업연구가 존 벨튼의 표현을 빌리면) 문자 그대로 ‘중층결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배급과 입장료라는 복잡한 계산이 뒤따라오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른 ‘영화사의 순간’에서 다시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것이다. 상영시간은 야심적인 영화가 영화라는 제도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었다.
아벨 강스는 <
바퀴>(1923)의 촬영을 이미 일 년 전에 마쳤다. 그리고 네거티브 필름을 들고 편집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완성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흉흉한 괴담도 있었다. 1921년이라는 생각을 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편집실을 방문한 이들은 편집본의 일부를 미리 볼 수 있었다. 보고 온 이들은 열광적인 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나쁜 상황을 덮으려는 거짓이라는 소문이 다시 돌았다. 아벨 강스는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서 아직도 ‘편집중’이라는 발표를 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자신이 편집하는 영화의 제목은 <La roue(바퀴)>이고, 촬영장에서 편집실로 가져온 네거티브 필름은 911,624피트라고 밝혔다. 1,000피트가 15분 분량이니 계산해보시기 바란다. 하지만 이 발표를 한 다음에도 아벨 강스는 1년 반을 더 편집실에 머물렀고, 1923년 2월 17일에야 첫 개봉을 하게 되었다. (역시) 전하는 소문에 따르면 아벨 강스의 편집본은 7시간 30분이(라고 한)다. 다른 소문에 따르면 9시간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32개의 릴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극장상영을 위해서 아벨 강스 자신에 의해서 2시간 30분 ‘단축판’이 완성되었다. 이 판본이 영화사에서 공식 상영본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에 DVD 판본으로 4시간 30분 상영본이 출시되었다. 아쉽지만 <바퀴>의 아벨 강스 편집본은 남아있지 않다. 아벨 강스의 열광적인 탐구자들에 의해 남겨진 필름들을 모아서 아벨 강스의 원래 의도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2019년 프랑스 뤼미에르 영화제에서 아벨 강스의 편집본에 가장 가까운 7시간 ‘복원판’이 상영되었다. 처음부터 위대한 걸작의 반열에 올랐고, 그런 다음에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해서 열광적인 새로운 지지자들을 낳았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사진: "La roue"(좌, 우), IMDb)
만일 영화를 보기 전에 <바퀴>의 줄거리를 먼저 ‘읽는다면’ 그렇게 훌륭할까, 라는 의심보다 먼저 이렇게까지 긴 상영시간을 어떻게 진행 시켰을지 의아할 것이다.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다. 기관차 운전수 시지프는 사고로부터 어린 고아 노르마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로 입양한다. 시지프에게는 또래 나이의 아들 엘리가 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어른이 된다. 시지프는 노르마가 자란 모습을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껴 돈 많은 부자 친구 에르산에게 의논을 하지만 노르마를 보고 욕심이 생겨 자신이 가로챈다. 이때 엘리도 자신이 노르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시지프는 시력을 잃고, 엘리와 에르산은 몽블랑 산벼랑에서 대결을 벌여 죽음을 맞는다. 아들을 잃은 시지프는 노르마에게 화를 내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고 다시 아버지와 딸로 돌아간다. 노르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지프를 돌보면서 세월을 보낸다. 마을 축제가 있던 날 시지프는 축제에 춤을 추러 간 노르마를 기다리며 숨을 거둔다.
열광적인 찬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은 <바퀴>에서 줄거리를 거들떠보지 말라는 것이다. 입체파 화가이자 영화를 제작한 페르낭 레제는 그 찬미자 중의 한 명이다. “영화는 극적인 상태, 감정적인 상태, 조형적인 상태가 있다. (...) 아벨 강스는 <바퀴>로 영화를 조형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라고 예찬했다. 그러면서 “시네마토그래픽한 혁명은 우리가 거의 주시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바로 그걸 <바퀴>가 성취했다고 말했다. 아벨 강스는 <바퀴>의 네거티브와 함께 편집실에서 긴 시간을 보낼만한 가치가 있었다. <바퀴>를 보면 즉각적으로 당신의 눈앞에서 홀린 듯이,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한데, 시각기관을 감전시키는 것처럼 압도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의 리듬이다. 기관차의 속도, 뿜어내는 연기,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이어지는 철도, 철도 옆의 신호판들, 기관차의 바퀴, 달려가는 속도에서 바라보는 풍경, 클로즈업과 롱 쇼트의 거의 무한정한 교차. <바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배우들이 아니라 기관차다. 이 속도의 리듬감에 홀려서 <바퀴>의 화면 구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달리는 기관차의 바퀴와 그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
인물에 대한 롱 쇼트와 클로즈업
<바퀴>를 보고 열광한 것은 파리의 시네필뿐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의 쿨레쇼프 공장의 학생들, 그중에서도 예이젠슈타인은 <
시월>(1927)에서 분명히 빠른 교차편집을 (긍정적인 의미로) ‘베꼈다’. 할리우드의 편집실에서도 <바퀴>는 감탄을 자아냈다. 도쿄의 ‘영화광’들은 아낌없이 ‘傑作’이라고 불렀다. 일본 개봉 제목은 <철로의 백장미>였고, 이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불렸다. 좀 더 섬세하게 <바퀴>를 지지한 에밀 뷔이에르모즈는 “흑과 백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면서 “석탄 먼지와 기차 연기의 비극적 어둠으로 시작해서 영원히 쌓인 눈의 순수함과 고통을 달래는 조용함으로 끝난다”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바퀴의 시각적 테마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그리피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아벨 강스가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바퀴>를 지지한 명단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장 콕토와 루이 델뤽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언어의 진화」에서 몽타주의 성공적인 예로 삼았다. 프랑수아 트뤼포도 여기에 가세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포토제닉한 이미지와 몽타주가 운동하는 액션영화라고 불렀다. 내가 <바퀴>를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설명할 만한 비평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영화에서 카메라의 이동 쇼트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를 처음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간절하게 아벨 강스가 편집한 <바퀴>의 첫 번째 판본이 보고 싶다.
<바퀴> 중 아이비 클로제(좌)와 가브리엘 드 그라본느(우) (사진: "La roue",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카페 느와르>(2009) 이후 <천당의 밤과 안개>(2015), <녹차의 중력>(2018), <백두 번째 구름>(2018)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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