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27일, 발터 루트만의 추상 영화 ‘빛의 캔버스’ <빛의 유희, 작품 1번>이 베를린에서 상영하다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4-07-30조회 1,956
사진: "Lichtspiel Opus 1.",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를 뒤져나가면서 슬픈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순간? 영화가 가졌던 하나의 가능성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중단되었을 때. 이번에는 세계영화사의 슬픈 순간 중의 하나와 만날 차례이다. 아마 수없이 이런 순간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1887~1941)은 18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 취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중립국으로 모인 다다이스트들의 도피처였다. 여기에 한스 리히터, 트리스탕 차라, 에미 헤닝스, 한스 아르프, 하여튼 셀 수 없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도 여기 머물렀고, 이웃 도시에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던 블라디미르 레닌도 잠시 체류했었다. 아마 여기서 발터 루트만은 다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909년에 독일로 돌아왔고, 뮌헨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어와 교분을 맺었다. 잠시 파울 클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파울 클레는 닥치는 대로 화가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발터 루트만은 그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그의 영화들 속의 이미지를 가져왔겠는가.
 
   
(좌1) 발터 루트만 (사진: "Walter Ruttmann", IMDb)
(우2) 발터 루트만 연출 <빛의 유희, 작품 2번>(1922), <빛의 유희, 작품 3번>(1924) (사진: "LICHTSPIEL: OPUS II", MUBI / "Opus III", IMDb)

발터 루트만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벨기에 아르 누보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헨리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를 통합하여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하지만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는 바우하우스를 곧 탈퇴하였고, 독일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미술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쳐 가기로 한다.) 이 학교는 예술의 창조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교육 목표이자 학교의 정체성이며 바우하우스의 프로젝트라고 선언(하다시피)했다. 이 학교에 네덜란드에서 《데 스타일(De Stijl)》을 창간한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방문했고,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 엘 리시츠키도 찾았다. 바우하우스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였다. 바우하우스는 산업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좌) 바우하우스 (사진: "Chronology", Bauhaus Dessau)
(우) 1920년대 바우하우스 마스터 하우스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사진: "Biography", MOHOLY-NAGY FOUNDATION)

발터 루트만은 화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추상주의 양식에 끌렸다. 그런 다음 영화를 끌어들였다. 이때 발터 루트만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이트(site)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예술에서의 보편언어’를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와 추상의 형식을 서로 결합하는 미래를 선언하는 《데 스타일》의 ‘기계 미학’에 관한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발터 루트만이 선택한 길이 아방가르드 영화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트만 자신은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좀 더 간단하게 스크린을 새로운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캔버스는 ‘시간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였으며 여기에 “우리 시대의 속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빛의 유희, 작품 1번(Lichtspiel; Opus 1)>(1921)이다. 영화 제목이라기보다는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 상영 시간 11분 44초. 음악 막스 부팅. 검은 바탕 화면에 푸른색과 초록색 원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린 이 작업은 명백히 칸딘스키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였다. <빛의 유희, 작품 1번>은 1921년 4월 27일 베를린 마르모르하우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 극장에서 한 해 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을 공개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평가 베른하르트 디폴트는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루트만은 자신의 스피드를 미래주의자 캔버스의 영화적 돌진으로부터 가져왔다”라고 썼다. 영화와 미술은 표현주의 영화들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번 친교를 맺었다.
 
   
<빛의 유희, 작품 1번> 중

하지만 <빛의 유희, 작품 1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상품 광고 아이디어를 찾던 쪽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방가르드와 비즈니스가 서로 결합했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다시 한번 돈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산업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발터 루트만뿐이 아니라 많은 실험 영화 작가들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바우하우스였다. 산업 디자인의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영화라는 표현 대신 매체로서 ‘빛의 구성과 조립으로 이루어진 이 종합’에 관해 1922년 《데 스타일》에 ‘생산, 재생산’이라는 글을 썼다. 발터 루트만은 자신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왁스-커팅기에 관한 허가권을 얻은 다음 1926년에 로테 라이니거의 영화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1926) 오프닝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중

일시적으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다리를 놓았던 순간은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발터 루트만은 추상적인 이미지의 ‘빛의 캔버스’를 버리고 산업 디자인 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1935년, 발터 루트만은 군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치당은 그가 1928년에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독직에서 해고하고 그 자리에 레니 리펜슈탈을 지명했다. 그 영화가 <의지의 승리>(1934)이다. 발터 루트만의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오스카 피싱거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1936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월트 디즈니의 <환타지아>(제임스 알가 외, 1940) 작업에 참여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7년에 시카고에 머물렀고, 미국에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한스 리히터는 작업을 중단하고 1940년 뉴욕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빛의 캔버스’는 그렇게 섬광처럼 빛을 발한 다음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하나의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카페 느와르>(2009) 이후 <천당의 밤과 안개>(2015), <녹차의 중력>(2018), <백두 번째 구름>(2018)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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