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5월 27일, 루이 델뤽이 ‘시네아스트’라는 호명을 만들어 내다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4-06-24조회 3,114
사진: "LOUIS DELLUC",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이상한 일이긴 한데 누구나 이들을 부르는 말, 어떤 이들이냐면,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니는 이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고 미친 듯이 보러 다니는 이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보러 다니는 이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게 직업인 것처럼 보러 다니는 이들, 아니,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게 임무라고 생각하는 이들, 심지어 고다르는 “영화에 병든 자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이들, 아마 고다르는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편집실에서 만난 자크 리베트와 프랑수아 트뤼포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하여튼, 이 사람들을 ‘시네필(cinephile)’ 혹은 ‘시네필리아(cinephilia)’라고 부르는데, (이미 앞서 한 말을 환기하자면) 이상하게도 누가 이 말을 처음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네필리아’라는 말이 영화(ciné)와 우애(友愛)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필리아(philia)의 합성어라는 설명은 있지만 누가 이 말을 처음 ‘합성’했는지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 말을 1920년대 파리에서 이미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무리에게 파리 시민들은 적대적이었으며, (부르주아들은 오페라나 무도회에 갔다), 영화에 열광하는 초현실주의자 그룹에 대해서 지식인들, 혹은 문인들은 위험하게 바라보았으며, 게다가 그때 미국 영화들이 차례로 파리의 극장가에 도착했는데, 특히 그중에서 그리피스, 채플린, 세실 B. 데밀의 영화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미국 영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속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미국에서 온 활동사진에 빠져들었다고 빈정거리면서 그들을 ‘시네필리아’라고 불렀다.
 
루이 델뤽(Louis Delluc, 1890. 10. 14.~1924. 3. 22.)
사진: "Louis Delluc", IMDb

이탈리아인 리치오토 카뉘도가 파리에서 ‘시네필리아’들을 위해 맹렬하게 영화를 방어하고 있었고, 여기에 합류하는 ‘시네필리아’들이 나타났다. 루이 델뤽은 그중 한 명이었다. 영화보다 먼저 태어난(1890년 10월 14일) 루이 델뤽은 15살에 파리에 올라왔다. 처음에는 시를 썼고, 그라세 출판사에서 소설을 발표했다. 1910년부터 연극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잡지 《코메디아 일뤼스트레(Comœdia Illustré)》의 편집장이 되었다. 루이 델뤽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이었다. 맥 세네트, 그리피스, 세실 B. 데밀의 영화에 매혹되었고, 누구보다도 채플린의 단편 영화들을 보면서(아직 채플린이 첫 번째 장편영화 <키드(The Kid)>(1921)를 찍기 전의 이야기이다) 파리 지식인들, 문인들, 언론의 평가에 반발하였고 그 영화들에 찬사를 바쳤다. 루이 델뤽은 전투적인 ‘시네필리아’였다. 1917년에 영화잡지 《필름(Le Film)》을 창간했고, 이 잡지에는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 루이 아라공이 기고하였다. 1920년 1월에 첫 번째 ‘시네-클럽’을 조직했고(하지만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관련 소식을 주간지 형식으로 《쥬르날 뒤 시네-클럽(Journal du ciné-club)》을 발간했다.
 
   
잡지 《필름》과 주간지 《쥬르날 뒤 시네-클럽》
사진: Ciné-Ressources

다음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알겠다. 그러면 ‘시네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조건반사적으로 감독, 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면 촬영은? 조명은? 편집은? 프로듀서는? 배우는? 그리고 제작자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 이라고 나는 질문했다. 그들 모두를 부르는 말. 처음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으로 ‘연출(metteur-en-scène)’이라고 불렀다. 그때에는 이 모든 일을 현장에서 그렇게 세분화하지 않았다. 그때 영화는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기술자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현장에서 진행하는 사람.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사람. 연기 경험이 있는 사람. 혹은 말을 타거나 위험한 재주를 할 줄 아는 사람. 이 말을 에밀 뷔이에르모즈가 1916년 11월에 《르 땅(Le Temps)》에 사용하였고, 당분간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시네필리아’들은 이 표현이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연극에서 ‘연출’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영화가 연극의 하위 장르인 것처럼 여기게 하였다. 여기서 문제 의식을 가졌던 사람은 리치오토 카뉘도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에크라니스트(écraniste)’라고 호명했다. ‘에크랑(écran)’은 ‘스크린’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 을 ‘피아니스트’ 혹은 ‘바이올리니스트’와 마찬가지로 ‘화면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루이 델뤽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람인 ‘시네필’의 맞은 편 자리에 있어야 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화면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이 델뤽은 1921년 5월 6일 새로운 영화주간지 《시네아(Cinéa)》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영화만 다룬 건 아니고 일종의 문화 종합잡지였다. 그래서 뮤직홀의 소식, 새로운 재즈 동향, 그리고 샹송과 함께 영화를 소개하였다. 이때 루이 델뤽은 이 잡지에 등장하는 다른 장르의 대중 예술가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분리해내기 위해서 ‘연출(metteur-en-scène)’이나 ‘에크라니스트(écraniste)’보다 더 직관적이고 더 단순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21년 5월 27일자로 출간된 《시네아》 4호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시네아스트(Cinéaste)’라고 처음 불렀다. 오늘날에는 ‘시네아스트’를 영화 ‘예술가’의 표현처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시네필’의 맞은 편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만일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당신에게 누군가 “시네필이신가요”라고 질문하면,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저를 시네아스트, 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대답하면 당신의 영화 앞에서 다시 한번 마음 다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시네아》 2호, 3호, 5호
사진: "DELLUC Louis", calindex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카페 느와르>(2009) 이후 <천당의 밤과 안개>(2015), <녹차의 중력>(2018), <백두 번째 구름>(2018)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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