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서 첫 번째 다큐멘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1895년 12월 28일에 상영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10편의 영화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장비를 손에 넣은 많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à la lettre)’ 영화 제작자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사건, 인물, 풍경, 하여튼 각자의 호기심이 닿는 곳을 향해서 닥치는 대로 찍기 시작했다. 낯선 식민지를 찾아 나선 제국주의 시대의 탐험대에는 그들의 모험을 기록하는 촬영팀이 동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도시가 모습을 갖추면서 일련의 도시교향곡 형식의 실험적인 ‘기록’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1930년대까지 다큐멘터리라는 표현 대신 ‘넌픽션(non fiction)’영화라는 표현을 써서 영화의 하부 장르 중의 하나로 취급되었고, 이 표현은 꽤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 다큐멘터리의 태도를 지니고 찍기 시작한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답은 초기 영화사학자들과 다큐멘터리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소 입장에 따라 다르다. 로버트 플래허티의 <
북극의 나누크>가 다큐멘터리의 태도를 지닌 첫 번째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첫 번째 이정표가 되었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대부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사 책에 소개된 것과 달리 <북극의 나누크>는 로버트 플래허티의 첫 번째 북극 에스키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아무래도 영화 제작 모험담에 관한 과정을 통해 <북극의 나누크>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플래허티는 광산업자인 아버지를 따라 광산 측량기사가 되어 가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910년, 플래허티가 26살이 되었을 때 허드슨만 철광 탐사를 위해 북극 탐험을 하게 되었다. 네 차례에 걸쳐 북극 탐사를 떠나면서 플래허티는 방문한 장소와 사람을 촬영했다. 이때 처음에는 사진기로 촬영하던 플래허티는 세 번째 탐사를 한 1913년부터 영화 장비로 바꾸게 되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서 플래허티는 촬영기술을 3주 동안 배웠고, 이것이 그가 배운 영화 제작 교육의 전부였다. 여기서 촬영한 내용을 편집하여 1915년 3월 30일 토론토 대학교에서 시사를 가지기도 하였다. 플래허티는 이 과정에서 광산 측량기사로서의 직업을 버리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서의 미래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북극을 탐사하는 영화로부터 에스키모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록영화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영화를 제작할 결심을 했다. 프랑스 르비용 형제 상사(商社)에서 투자를 결정했고, 필름과 두 대의 카메라, 조명, 발전기, 여기에 현상과 인화를 위한 장비와 영사기까지 준비해서 1920년 8월 15일 허드슨만에 도착했다. 여기서 주인공으로 삼을 에스키모 ‘나누크’를 만났다. ‘나누크’의 원래 이름은 ‘알라카리아라크’였고, ‘나누크(Nanook)’는 그의 별명인 에스키모어로 ‘북극곰’이라는 뜻이었다.
모두 6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북극의 나누크>에서 플래허티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실제로 북극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앞에 있는 인물들이 배우가 아니라 ‘이누이트(Inuit)’ 북극 에스키모라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주기 위해 자막 설명, 빙산이 떠 있는 북극의 풍경의 장면(long_shot), 광활한 설경, 자연에 던져진 원주민들의 생활을 어떤 드라마의 개입 없이 차례로 보여주면서 영화 안에서 사실성(l’effet de realité)이라는 문제와 만나는 것이었다. 나는 로버트 플래허티의 영화 관람에 대한 경험의 깊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북극의 나누크>가 1920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관점에 따라서 두 번째 시퀀스의 ‘이누이트’ 에스키모와 백인들 사이의 물물 거래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장면은 희극적으로 진행되지만 정치 경제학적 약탈의 순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순간은 나누크가 카메라를 마주 보면서 웃는 장면이다. 어쩌면 이 순간의 장면을 보고 고다르는 브레히트를 끌어들여 카메라를 마주 보는 (<
비브르 사 비>)의 나나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인류학을 공부했던 고다르는 당연히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학교 교육이 아니더라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실에서 <북극의 나누크>에 열광했던 앙드레 바쟁의 조언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극의 나누크>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대목은 여섯 번째 시퀀스의 바다표범 사냥 장면이다. 5분 20초에 이르는 이 씬은 ‘나누크’가 얼음 구멍으로 드리운 낚시를 문 바다표범을 잡아당기면서 그의 동료와 가족을 부르고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줄다리기하는 장면이다. 플래허티는 두 대의 카메라로 찍으면서도 ‘나누크’가 낚시하는 장면을 긴장을 고조시키는 몽타주 편집을 위한 쇼트(close_up)로 교차 편집하며 진행하는 대신 낚시 장면의 사실성을 보존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서 지켜본다. 이 촬영은 다큐멘터리에서 관찰자의 거리(observer’s distance)를 발명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진 않다. <북극의 나누크>에 대해서 인류학자들은 현지답사(field work)의 관점으로 다시 다가가면서 로버트 플래허티가 영화를 위해 민족지 재현 장면의 많은 부분을 설정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플래허티가 찍은 ‘이누이트’ 에스키모들은 <북극의 나누크>를 촬영했을 때 이미 상당 부분 백인 문명을 받아들였으며, 영화를 위해서 과거 조상들의 방식을 재연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누크’의 아내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플래허티의 현지 에스키모 처가 아내 배역을 연기한 것이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발명했지만 동시에 다큐멘터리에서의 재현의 윤리에 대해서 질문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하지만 <북극의 나누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접근의 방법이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12개월간 ‘이누이트’ 에스키모들과 살면서 다큐멘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영화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아니, 질문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또 하나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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