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금방 첫눈이 내릴 것이다. 눈 내린 풍경에서 가장 웃긴 순간은 넘어진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누군가 미끄러져 자빠질 때일 것이다. 그게 꼭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미끄러져 넘어지는 모습을 볼 때 거의 기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물론 그런 다음에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거리를 지키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감춘 채 시선을 돌리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우리가 자빠지는 모습을 보고 공식적으로 웃을 수 있는 장소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 때이다. 지금도 이 개그는 웃음을 자아낸다. 브라운관에서 너도 나도 자빠질 때 그걸 바라보던 언론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자빠지는 것 말고 없다는 비난과 함께 지성이 없는 희극이라는 비판을 던졌다. 이 개그는 가장 단순하지만 매번 보는 쪽을 웃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자빠지는 개그가 시작된 곳은 아마도 보드빌 연극무대였을 것이다. 이 무대에서 활동하던 많은 배우들이 각자의 퍼포먼스를 갖고 카메라 앞으로 왔다. 보드빌 무대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 누가 가장 먼저 자빠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빠졌다. 왜냐하면 그 퍼포먼스가 가장 쉽고 가장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말했지만 이 퍼포먼스는 부상당할 위험이 항상 있었으며 게다가 상대방과의 앙상블이 중요했기 때문에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은 그의 경력 초기부터 자빠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1916년은 채플린에게 중요한 한 해가 되었다. 당시에는 매주 월급의 형식으로 지불하는 주급(週給)방식으로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다. 채플린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더 많은 주급을 받으면서 매년 연간 제작 편수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1915년에 연간 16편의 영화 연출(과 주연으)로 계약을 맺었던 것을 1916년에는 12편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시간적 여유는 채플린을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채플린은 좀 더 시나리오에 공을 들일 수 있었고, 자신의 개그 퍼포먼스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으며,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점점 그의 영화가 눈에 보이게 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채플린의 영화들은 점차 서사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고 드라마투르기를 작동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씬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러는 과정을 통해 씬 안에서 활동하는 동선과 드라마, 감정선, 퍼포먼스의 디테일, 그것들이 펼쳐지는 장소의 미장센,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거리를 정식화시켜 나아갔다. 채플린이 말한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클로즈업과 롱 쇼트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액션과 상황의 원근법을 창조해냈다. 원근법은 가까운 것(近)과 먼 것(遠)이 한자리에 있을 때만 구별되는 것이다. 채플린은 하나의 씬 안에서 그 둘 사이의 왕복운동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씬이 희극이자 비극이라는 천재적인 발명을 해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루게 될 것이다.
이 해에 만든 영화 중에서 마지막으로 개봉한 <롤러 스케이트장(The Rink)>은 상영 시간 24분의 소동극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찰리는 손님 주문을 받으면서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도 실수를 거듭하지만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면 보란 듯이 솜씨를 뽐낸다. 이때 찰리는 레스토랑에 온 진상 손님 스토우트씨를 여기서 다시 만나자 골탕을 먹인다. 게다가 여기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이 찰리를 롤러 스케이트장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스토우트씨와 마주친다. 일대 난동이 벌어지고 찰리는 유유히 빠져나와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달리는 자동차의 뒤에 매달려 뒤를 쫓아오는 신사들로부터 멀어진다.
두 번의 시퀀스에서 찰리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찰리는 롤러스케이트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미끄러짐과 불안정한 균형을 이용해서 우아한 동선을 먼저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무례한 악당을 사정없이 쓰러트린다. 이때 악당은 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번 제풀에 미끄러지고 자빠진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들어서는 순간 일반적인 균형의 법칙은 사라지고 갑자기 새로운 중력 법칙이 작동하는 것만 같은 세상이 될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찰리는 이제까지 보잘것없이 모두에게 구박받던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여기서 세상의 법칙에 대한 주인의 자리에 간다. 이때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는 세상의 법칙에 대한 전복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개그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부자들을 마음껏 웃어주는 위대한 퍼포먼스가 된다. 물론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찰리를 잡기 위해 스케이트장 안으로 몰려든다. 하지만 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 사이를 공기처럼 빠져나간다. 점점 더 스케이트장은 카오스에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율동의 동선으로 가득 찬다. 모두의 동선이 실타래처럼 뒤엉키는데도 찰리만은 우아한 동작으로 그들 사이를 그렇게 빠져나간다. 찰리 채플린은 여기서 자빠지고 넘어지는 개그 퍼포먼스의 스펙터클을 정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스펙터클이 품고 있는 웃음의 정치학을 발명해낸 것이다. 아마도 그때 이 스펙터클을 모스크바에서 레프 쿨레쇼프와 그의 제자들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 더. 아마도 그때 베를린에서 발터 벤야민은 유심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사 앞에서 나는 반문하고 싶다. 누가 이 스펙터클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는가.
※ 본 게시물에는 작성자(필자)의 요청에 의해 복사, 마우스 드래그, 오른쪽 버튼 클릭 등 일부 기능 사용이 제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