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에서 결정적인 하루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디 용서해주기 바란다. 어쩌자고 그런 것일까.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런 순간들이 하루하루 두렵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을 모시고 다시 되돌아가는 도리밖에 없다. 내가 되돌아가려는 날은 1911년 10월 25일이다. 그날 리치오토 카뉘도는 <이상주의자들의 대화>라는 잡지에 “제 6예술의 탄생”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차라리 이건 발표라기보다는 선언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왜 그러한가.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1907년 그의 위대한 저서(달리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창조적 진화>의 네 번째 장 ‘사유의 영화적 기작과 기계론적 환상’에서 이제 막 시작한 영화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아직 영화는 대중들에게 신기한 과학적 발명품이었으며 그 미래를 미리 들여다본 사람들은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를 (카뉘도는 헤겔의 미학 분류 체계를 따랐다) 건축, 조각, 음악, 미술, 시에 이어서 여섯 번째 예술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글은 파리의 영화인들을 흥분시켰던 것 같다. 아벨 강스는 카뉘도의 글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그 이듬해 3월 9일 <시네 저널>에 “제 6예술”이라는 글을 흥분에 가득 차서 발표했다. (그리고 이 글을 발터 벤야민이 읽은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글을 발표하던 날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리치오토 카뉘도에 대해서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영화에 매혹된 이 이탈리아인은 아무래도 영화에 대해서 우정을 나눌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파리로 그의 거주지를 옮겼다. 파리에서 거의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아간 카뉘도는 초현실주의자들, 다다이스트들, 큐비스트들과 주로 어울렸으며 그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화가 피카소,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가브리엘 단눈치오와 우정을 나누었다. 파리에서 처음에는 소설도 발표하고 단테, 성 프란체스코, 베토벤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카뉘도에게 가장 위대했던 예술가는 베토벤이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영화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물론 카뉘도는 영화를 보면서 자기 의견을 밀고 나갈 어떤 참고서적도 갖지 못했다. 초기영화사 연구자인 톰 거닝의 표현을 빌리면 아직 고전적인 영화 문법이 세워지기 이전의 ‘매혹의 광경이 잡아 이끄는(Attraction)’ 시기의 영화였다. 하지만 카뉘도는 놀라울 정도의 직관을 가지고 결정적인 발언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카뉘도는 영화감독을 연극무대연출자(metteur-en-scéne)와 구별하면서 '에크라니스트(écraniste)라고 불렀다. 스크린을 말하는 ‘에크랑(écran)'에서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카뉘도는 영화에서 테크놀로지의 중요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테크놀로지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 ’에크라니스트‘의 임무라고 분명히 했다. 이 말이 그 이후에 이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거의 같은 의미로 다시 사용한 사람은 ’카메라 만년필론‘을 내세운 알렉상드르 아스튀릭이다) 명백히 이 표현은 훗날 카이에의 비평가들이 연출자와 구별하여 작가(auteur)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앞지른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문장은 영화를 연극으로부터 분리해내면서 영화를 무엇보다도 ’시각적 드라마‘로 선언한 것이다. 카뉘도에게 가장 근본적인 예술은 두 가지였다. 건축과 음악. 그 다음으로 회화와 조각은 건축을 보충하는 것이며, 시는 언어의 노력이었다. 그러므로 카뉘도에게 궁극의 예술은 어떻게 건축과 음악을 하나로 만나게 하느냐의 문제였다. 카뉘도에게 영화는 영혼과 육체의 전체적인 표현이었으며, 카메라는 빛의 펜이었으며,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는 운동의 조형예술이었다. 카뉘도는 흥분하면서 영화 앞에서 짜라투스트라가 웃고 노래할 것이라고 찬사를 바친다. (카뉘도 자신이 니체의 철학에 매혹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파리의 많은 문필가들이 니체의 글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상황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문장 그대로 카뉘도에게 영화는 미래의 예술이었다. 미래주의자이기도 했던 카뉘도에게는 당연한 결론이다. 물론 이 표현들이 지나치게 수사적이고 19세기 낭만주의 비평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카뉘도가 지적하는 영화에 대한 맹렬한 흥분의 예언들이 얼마나 통찰력을 담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는지를 지나치면 안 될 것이다.
리치오토 카뉘도는 1927년 자신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모아놓은 <이미지의 공장>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거기서 영화를 여섯 번째 예술로부터 일곱 번째 예술로 다시 자리매김했다. 그 앞자리에 무용을 포함시킨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카뉘도의 열광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리치오토 카뉘도를 장 엡스탱은 “영화라는 시의 전도사”라고 불렀다. 나는 카뉘도를 영화사의 첫 번째 시네필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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