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언제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은 간단한데 이걸 설명하는 건 영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건 할리우드가 단순하게 지명이 아니라 복잡하게 서로 성격이 다른 자본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산업이며,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할리우드는 그저 호명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여기에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실제로 물적인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 세워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탄생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영화사의 순간을 건드리려는 것이지 산업의 역사를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마침내 할리우드가 나타났군요, 라고 말해보고 싶어지는 날. 그러므로 내가 기술하는 순간은 할리우드가 자본의 성격을 물적 형태로 드러낸 그 어느 날이다. 당신이 정치경제학의 관점을 갖고 다른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어느 날이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탄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견해를 존중한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을 할리우드라고 처음 부르게 된 데에는 ‘믿거나 말거나’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세기 말 부자인 H. J. 휘트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 그때 마차를 타고 가던 휘트니는 나무를 끌고 가던 흑인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흑인이 “아이, 할리우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I, hauliing-wood(나는 아주 힘겹게 나무를 끌고 있어요)”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휘트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휘트니는 이 지역의 땅 480에이커(1.942제곱킬로미터)를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가 산 땅 이름을 ‘할리우드(성스러운 나무)’라고 불렀다. 그와 비슷한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855년, 할리우드에 최초의 집이 지어졌고, 그 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우체국이 들어선 것은 1900년이 되어서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은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 호텔이 들어섰고, 커다란 2개의 시장이 세워졌다.
<데이비드 W. 그리피스>
여기서 영화를 찍은 최초의 중요한 인물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이다. 그리피스는 뉴욕의 투자자들의 현장 간섭에 질린 상태였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스타의 얼굴이 좀 더 크고 많이 나오기를 원했고, 그저 액션장면만을 원하면서 종종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피스는 그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에 가서 영화를 찍었다. 뉴욕의 투자자들이 오기에 할리우드는 너무 멀었다. 그때까지 영화 제작의 중심지는 뉴욕, 그 다음은 시카고였다. 1910년 단편영화 <오래된 캘리포니아에서>를 찍었다. 그리피스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늘 날씨가 좋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여기는 사막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가깝게 있는데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1911년 10월 26일, 네스토어 픽쳐스 컴퍼니는 여기에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그 뒤를 따라서 파라마운드, 워너 브라더즈, RKO, 컬럼비아 영화사가 차례로 스튜디오를 지었다. 그리피스의 영화를 보고 세실 B 데밀도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발적인 작업이었고, 좀 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더 큰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산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본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러스트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독점자본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투자자들은 새로운 자본이 이 시장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았다. 이 배타적 자본의 방어에 대해서 반(反) 트러스트의 입장을 취한 자본가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서 유니버설 매뉴펙처링 코퍼레이션의 대표 칼 럼리는 기존 영화 트러스트들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지역에서 영화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마도 20세기 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칼 럼리는 독점자본의 트러스트에 반대한 것이지 영화예술의 융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영화에서 자본의 집약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칼 럼리는 남부 캘리포니아 산 페르난도 협곡을 사들였다. 230 에이커를 사들였고, 여기서 영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장소로 모아놓고, 영화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집약, 기술 집약. 자본집약의 고전적인 토대를 만들어냈다.
칼 럼리는 1915년 3월 21일 유니버셜 스튜디오 개막식 행사를 치렀다. 사막 위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가 세워지는 날이었다. 17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이 독일소년은 미국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소망이라고 종종 말했다. 어쩌면 이 날 칼 럼리는 진정한 소원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칼 럼리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할리우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 세계 곳곳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진 왕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날 스튜디오 개막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칼 럼리는 철두철미한 실용주의자였던 것 같다. 칼 럼리는 개막식 연설을 생략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래도 모여든 사람들은 행진을 하면서 미국 성조가를 불렀다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스타였던 폴린 부쉬, J. 워렌 커리건, 그레이스 커나드, 프랜시스 포드, 론 채니, 윌리엄 클리포드, 거르투르드 셀비와 차례로 계약했다. 그들은 서명을 하자마자 뉴욕을 정리하고 반대편에 자리한 로스앤젤리스로 옮겼다.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세워지자 할리우드 영화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시스템을 발명해나갔다. 데이빗 보드웰은 할리우드의 영화사는 스타나 감독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유례없는 시스템의 역사라고 단언했다. 할리우드는 이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한 뉴욕과 제작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로 이원화되었고, 영화는 마치 공장과도 같은 하나의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날은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한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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