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필름 다르’의 고전 <기즈 공작의 암살>이 개봉하다 1908년 11월 17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8-03-02조회 6,562
기즈 공작의 암살

1895년 파리에 처음 영화가 등장했을 때는 그저 과학적 발명품이었지만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로 19세기의 대중은 이 구경거리에 열광했다. 대중이 모이는 곳에는 장사꾼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는 법이다. 자본이 이곳에 투자되기 시작했고 이윤이 발생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처음에는 이 구경거리에 대해 최후의 귀족들과, 그들과 사교클럽에서 어울리던 부르주아들이 모두 애써 천박하다고 경멸하려 애썼다. 여전히 그들의 진정한 구경거리는 오페라와 연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 구경거리를 무시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1908년 2월 14일, 아카데미 학술회원 앙리 라브당, 건축가 장 카미유 포르미제,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인 샤를 드 바르지, 그리고 이 자리를 마련한 장사꾼 폴 라피트가 샤라 홀에 모여 ‘필름 다르(Film d’Art) 상사(商社)’를 세웠다. 명분은 이 천박한 대중의 구경거리를 예술영화(Film d’Art)로 끌어올려보자, 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돈을 벌자, 는 것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시장에 자신들을 위한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황당무계한 눈속임이나 저속한 활극 대신 사회 엘리트들이 보고 즐길 만한 고급스러운 내용과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할 만한 기회를 제공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도대체 그런 게 무엇일까. 그들은 파리 교외에 자리한 뇌이에 스튜디오를 세운 다음 배우인 샤를 드 바르지를 내세워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를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대로 코메디 프랑세즈는 몰리에르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다음 루이 14세의 지지 아래 프랑스 연극의 전통을 이끄는 유서 깊은 극장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영화에서 문제가 생기는 순간은 언제나 ‘어떻게’에서 시작한다.
플 들라로슈의 그림 <기즈 공작의 암살>(1834)
플 들라로슈의 그림 <기즈 공작의 암살>(1834)

그들이 생각한 ‘필름 다르(예술영화)’가 무엇인지 정체를 드러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레지나 바데가 연기한 <뮈르토의 비밀>, 그리고 마임 드라마 <인상 L’impressionniste fin de sicle>(조르주 멜리아스, 1899)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무대를 재현한 다음, 말 그대로 ‘그냥’ 찍은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일종의 기록영화였다. 그들은 마치 거기에 카메라의 작은 움직임이나 화면 사이즈의 변화, 혹은 초기 단계에서의 편집, 하여튼 그 무언가를 더하는 순간 이 훌륭한 무대의 ‘예술성’에 어떤 흠집이라도 생기기라도 할 것처럼 그냥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었다. 그들의 목표는 연극 무대를 보러오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영화 극장에서 관람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영화. 그런데도 <기즈 공작의 암살 L’Assassinat du Duc de Guise>(앙드레 칼메트, 1908)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588년 12월 23일, 신구교도의 갈등 속에서 앙리 3세는 자신의 정적(政敵)인 기즈 공작을 침실로 부른 다음 자신을 따르는 충신들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암살하였다. 상영시간 15분인 이 영화는 멈추어 선 카메라와 호화로운 무대 미장센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오가면서 기즈 공작을 처형하는 게 그 전부이다. 짧은 프롤로그가 끝나면 왕의 침실로 옮겨가고 시종일관 그 자리에서 카메라는 ‘죽은 듯이’ 멈춰 서 있을 뿐이다. 배우들이 자기 동선에 따라 움직이긴 하지만 1.33 사이즈는 너무 좁고 게다가 너무 멀었다. 샤를 드 바르지가 연출하고 주연을 했으며, 앙리 라브당이 시나리오를 썼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들이 화면에 즐비하게 출연했다. 알베르 랑베르, 가브리엘르 로빈느, 베르타 보비. 놀라운 건 이 영화의 음악을 카미유 생-상스가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필름 다르’의 영화들은 일시적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명성에 기대어 허영을 부추기면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변덕스러운 대중은 이런 따분한 영화를 위해 계속해서 지갑을 열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게다가 위대한 미국영화의 시대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피스의 시대. ‘필름 다르’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영화에서의 예술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 끔찍한 시도였다. (내가 아니라) 프랑수아 트뤼포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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