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H. 인스, 서부극을 찍기 위해 LA 오렌지 농장을 사다 1911년 10월 1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8-06-30조회 4,312
토마스 H.인스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서 서부극은 소비에트에서의 볼셰비키 혁명에 비견할 만한 하나의 질서와 문명의 탄생이라고 썼다. 그 말은 아마 부분적으로만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부극의 역사가 사회주의 혁명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21세기에 보고 있다. 서부극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는 동안 지구 반대편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 (1903)의 성공 이후 관객들은 더 자주, 더 많이, 더 오랜 상영시간 동안 서부영화를 보기를 갈망했다. 아직 완전하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바이타그래프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맹렬하게 서부극을 제작했다. 그들은 1911년 매주 네 편의 (당시의 배급 방식에 따라) 네 개의 릴을 제작할 것이며, 그 중 하나가 서부극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감독이 서부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할리우드에 막 도착한 D. W. 그리피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이 장르에 재능이 없음을 알고 손을 뗐다. 그중에서 알랜 드완이 앞장을 섰다. 하지만 그는 서부극의 첫 번째 위대한 이름이 아니다.
토머스 H. 인스는 영화사 초기의 가장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바이슨 픽처스와 계약하고 서부극을 연출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에덴배일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때는 프로듀서들이 종종 감독을 했기 때문에 이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머스 H. 인스는 서부극을 찍기 위해 캘리포니아를 돌아보았다. 물론 사방에서 서부극을 찍기 위해 로케이션을 떠났지만 그때는 20세기 초기였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낯선 산골짜기, 혹은 정글과 다름없는 숲, 강도들이 출몰하는 낯선 동네에서 영화를 찍기 위한 말과 기병대, 인디언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는 느려터졌고 운송수단은 달리 없었다. 토머스 H. 인스는 건맨 몇 명과 인디언 두세 명, 열댓 명의 강도단이 나오는 서부극은 곧 인기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다. 토머스 H. 인스는 여기서 서부극을 찍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운이 좋았다. 때마침 밀러 형제가 이끌던 101 랜치 와일드 웨스트 쇼 순회공연단이 오클라호마의 겨울을 피해 크리스마스에도 따뜻한 날씨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와일드 웨스트 쇼에는 연기를 할 수 있는 300명의 카우보이와 카우걸, 인디언, 인디언 여자들, 여기에 훈련받은 600필의 말과 소떼, 버펄로들이 포장마차와 역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토머스 H. 인스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들과 계약한 다음 2만 에이커의 오렌지 농장을 샀다. 이런 엄청난 농장이 그때 로스앤젤레스에는 거의 널려 있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어디서도 오렌지가 잘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첫 번째 서부극 <평원의 전쟁 War on the Plains>(1912)을 찍었다. 이 영화는 서부극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단지 그 규모에서만이 아니라 토머스 H. 인스는 이 장르를 하나의 완전한 세계, 또 다른 하나의 질서가 활동하는 우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서부극은 단지 새로운 장르의 발명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이 영화는 단숨에 토머스 H. 인스를 서부극의 가장 신뢰할 만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성공의 여세를 몰아 새로운 여주인공을 찾았고 그녀가 메리 픽포드다. 위대한 발견. 그로부터 3년 뒤에 존 포드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이 위대한 장르의 역사가 시작된다. (계속)  
 
<평원의 전쟁>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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