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달랐던 광복기의 문예영화 <해연>

by.박유희(영화평론가) 2016-10-27조회 2,653
<해연>(이규환, 1948)은 ‘광복 이후 최초의 문예영화’로 알려진 영화다. 그러나 필름이 유실되어 그 제목만 회자되다가 2015년 일본 고베영화자료관을 통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실체를 확인해보니 이 영화는 현재 우리에게 일반화한 ‘문예영화’와 사뭇 달랐다. 우선 <해연>은 함세덕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남매간의 사랑’이라는 모티프를 부분적으로 차용한 것 이외에는 원작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라는 개념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건국기(建國期) 젊은이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계몽하려는 주제가 뚜렷해, 향토색이나 개인의 내면을 내세우는 문예영화 전성기의 분위기와도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광복기에 사용된 ‘문예영화’의 개념이나 지향이 6・25전쟁 이후 분단 체제 아래의 그것과는 달랐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문예영화로 대표되는 남한의 예술영화에서 취택되고 배제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겉 이야기와 속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겉 이야기는 정애가 불량소년들을 감화해 건국에 기여하는 것이고, 속 이야기는 정애의 동생 정숙이 수길이라는 감화원 소년과 남다른 정을 나누는 것이다. 여기에서 겉 이야기는 계몽적인 주제를, 속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적인 서사를 보여주는데, 결국 멜로드라마적인 서사가 ‘사랑을 통한 감화’로 의미화되며 겉 이야기의 주제에 수렴된다.

영화는 주인공 정애가 결혼을 깨고 감화원으로 떠나는 서울역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애는 광복 후 급속도로 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젊은이들이 사리(私利)에만 열중하는 철수에게 실망했고, 철수와 같은 이의 죄로 거리를 헤매게 된 불량소년들을 돌봄으로써 그 죄를 씻기 위해 감화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정애는 건국에 기여하겠다는 신념에 찬 젊은이로서 굳건한 의지를 내보이며 이 영화의 주제를 분명히 한다. 이어지는 감화원 장면에서는 학생들이 ‘어둠은 갔어라’라는 노래를 배우고 있다. 어둠은 갔으니 동무들 모두 희망을 가지자는 가사 속에 갈매기 울음이 평화로운 자장가에 비유된다. 이 노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갈매기(해연)’인지에 대한 이유를 시사한다. 어두운 식민지 시기를 지나 광복을 맞이한 시점에서 희망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갈매기’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서정적인 상관물들이 일관되게 계몽적인 주제와 연관된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소비에트 몽타주를 연상시키는 노동 장면이다. 감화원에 종이 울리자 선생님과 학생들은 힘을 합쳐 황무지를 개간한다. ‘헤이 헤이 에헤야’로 시작하는 노동요의 리듬에 맞추어 그들이 힘찬 곡괭이질을 하는 가운데, 바위에 부딪히는 거센 파도가 교차 편집되며 노동의 에너지를 증폭하는 비유로 활용된다. 이 장면만 본다면 이 영화는 북한영화와 매우 유사한 주제와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남한영화임을 분명히 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계몽성의 기저에 기독교가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공간부터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감화원이고, 정애가 감화원에 가는 동기도 일종의 대속 의식이다. 또한 감화원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교육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에 따라 그 색깔이 모호한 정숙과 수길의 사랑도 기독교적 사랑으로 합리화된다. 마지막에 정숙이 떠나자 슬픔에 잠긴 수길에게 정애가 “여기 큰누나가 있잖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정숙과 수길의 멜로드라마적 구도를 기독교적 형제애로 환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독교적 계몽은 이후 남한 문예영화의 예술성 구성에서 중요한 요소였고, 문예영화 전성기에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어 한층 강화되기도 했다. 한편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를 연상시키는 집단 노동 장면이나 사실주의적 몽타주는 6・25전쟁 이후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영화에서 유독 눈에 띄는 현실 개혁의 강렬한 에너지도 이후 문예영화에서는 점차 사라진다. 이외에도 달라진 것이 많지만, 필자에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결혼을 파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찾아가고 남성과 당당하게 토론을 벌이는 정애와 같은 캐릭터다. 6・25전쟁 이후 1980년대 전반기까지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멜로드라마의 순종적 여주인공으로 대부분 순치되고, 공포물과 같은 환상계를 통해서만 가끔 복수를 꿈꾸는 가운데, 정애와 같은 목소리를 내려면 수십 년을 기다리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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