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영화가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장황한 설명을 요구한다. 아직 영화는 정의되지 않았고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양보할 생각이 없다.
나는 1894년 4월 14일 토머스 에디슨이 뉴욕 브로드웨이 1155번가에 있는, 앤드루와 에드윈 홀랜드 형제가 문을 연 극장에서 선보인 에디슨 키네토스코프를 이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할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한 다음 여기서는 그냥 건너뛰기로 했다. 물론 키네토스코프는 중요하다. 하지만 혼자 영화를 보는 이 750장의 연속 사진이라는 5센트 모델은 자기의 시간을 얻기까지 한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 다음에도 언제 영화를 첫 상영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수없이 많은 사례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는 이미 1895년 3월 22일 프랑스 국립산업진흥협회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게다가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유료 상영하기 이미 두 달 전에 베를린에서 막스 스클라다노프스키가 유료 상영을 하였다.
오늘날 영화 역사학자들은 1895년 12월 28일은 첫 번째 영화 상영이 아니라 우후죽순으로 유럽에서 상영을 시작한 신기한 발명품 시네마토그래프의 가장 성공적인 유료 상영일이라는 데 거의 합의에 도달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사에서 발명가들이라기보다는 뛰어난 마케팅의 첫 번째 대가였다.
그렇게 영화사는 시작되었다
그날, 그러니까 1895년 12월 28일 토요일 오후 5시, 기록에 따르면 바람이 몹시 차갑던 날, 파리의 카퓌시네가(街) 14번지 그랑 카페 안의 인디안 살롱에서 열 편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거리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있는 것은 이상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들은 모두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하고 현상한 필름이었다. 상영 순서는 다음과 같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에서의 귀가> 46초, <정원 살수기> 43초, <사진협회, 배를 타고 리옹에 정박> 48초, <말 등에 올라타기> 46초, <금붕어 낚시> 42초, <대장장이들> 49초, <아기의 아침식사> 41초, <모포 위로 점프> 41초, <리옹의 코르들리에 광장> 44초, <바다> 38초. 이 영화들은 모두 단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뤼미에르 형제가 비교적 가벼운 카메라를 들고 19세기 프랑스의 일상을 찍은 내용이다. 모든 영화는 17m 정도의 길이를 지닌 프린트였으며, 매번 상영이 끝나면 다시 릴을 바꾼 다음 상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무엇보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영 전에 뤼미에르 형제는 관람객들에게 상영 순서를 인쇄한 프로그램 전단을 나누어주었고 그 순서대로 상영하였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서 브뤼셀에서 상영하였고 상영 순서도 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찍은 내용보다 이 영화들이 보여지는 순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뤼미에르 형제는 이 열 편의 영화가 각각 독립된 영화들이라기보다는 이것이 열 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당연히 이 목록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시오타 역에서의 기차의 도착>은 어디에 있나요? 그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날 상영되지 않았다. <기차의 도착>이 상영된 것은 이듬해 1896년 1월 25일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최초 관객들은 극장 바깥으로 뛰어나가지 않았으며 그건 영화가 최초로 상영된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의 첫 번째 유료 상영 프로그램을 짤 때 이미 이 영화의 촬영을 마친 다음이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어쩌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그다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열 편의 영화를 본 관객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마도 조르주 멜리에스일 것이다. 그는 이 발명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시네마토그래프가 새로운 세기의 위대한 마법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영화사가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