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대표하는 감독과 작품 20
한국영화가 100년을 맞게 되는 2019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호부터 한국영화사 100년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모두 20회가 연재될 것이며, 대체로 10년 단위로 구분해 각 시기를 2회로 나눠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각 회는 해당 시기의 영화사적 배경과 주요한 사건을 서술한 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영화 1편, 이를 연출한 감독을 함께 소개할 것 입니다. 또한 기존의 영화사 서술보다는 제작 현장과 영화 텍스트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출 생각입니다. 이 연재가 끝나는 2019년 10월까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작품 20편과 감독 20인에 대한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나갈 것입니다.
한국영화의 시작
한국영화사의 기점은 언제일까. 1966년 한국영화인협회와 공보부가 논의한 끝에,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를 ‘영화의 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인 셈인데, 그 이유는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로 1919년 10월 27일은 김도산의 ‘신극좌’라는 신파극단이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김도산, 1919)라는 연쇄극을 처음 단성사 무대에 올린 날이기 때문이다. 연쇄극은 연극(무대)과 영화(필름)가 결합한 공연 방식이었는데, 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주체가 되어 촬영한 필름들이 연쇄극 속에서 영사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의 극장가에서 일본인 극단의 연쇄극은 상연되었고, 특히 조선의 곳곳을 촬영한 장면들이 스크린에 영사된 바 있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사의 기점은, 조선(한국)영화인의 자본과 연출로 제작된 것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사실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등 영화를 발명한 서구 국가들의 영화사는 제작과 상영의 출발점이 일치한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의 영화사는 서구 ‘활동사진 (motion picture)’의 수입과 감상으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특히 한국은 영화의 감상과 제작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제작(film)의 역사는 잠시 후에 집중하기로 하고, 먼저 영화 관객과 감상의 문제, 즉 영화문화(cinema)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에서 처음 활동사진의 대중 상영이 이루어진 시점은 1903년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는 그해 6월 23일자 「황성신문」의 활동사진 광고에 근거한 것인데, 동대문 안에 있는 한성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일요일 및 비 오는 날을 제외한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동화 10전을 받고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매일 밤 상영관은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이후 이 공간은 1900년대 전통 연희뿐만 아니라 활동사진의 본거지이기도 한 광무대로 이어진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의 여행 강연자 버턴 홈스(Burton Holmes)가 1901년 중국을 거쳐 한국을 방문, 서울을 촬영하고 고종에게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상영은 아니었다.
서구 연속영화와 조선의 연쇄극
1910년대 경성 흥행가는 활동사진, 즉 영화가 압도했다. 경성 시내는 청계천을 경계로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과 남산 아래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으로 분리되었는데, 극장가 역시 일본인 거리에 경성고등연예관(1910년 개관)을 위시로 한 대정관(1912년), 황금관(1913년)이, 조선인 거리 종로에 우미관(1912년)이 세워졌다. 그리고 1918년 박승필이 운영권을 획득한 단성사가, 그해 12월 조선인 전용 영화상설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당시 조선인 극장 우미관과 단성사는 일본영화보다는 서양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했다. 특히 1916년경부터 미국 연속영화가 조선인 극장가를 사로잡았다. ‘연속영화(serial film)’는 장편 극영화가 정착되기 이전인 191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제작되고 유행했다. 주로 활극적인 내용을 2권(롤) 1편으로 구성하고 그 편의 마지막에 위기일발의 장면(cliffhanger)을 넣어, 최종편이 끝나는 12, 13주부터 24, 25주 동안 관객들이 매주 영화관을 다니도록 만드는 형태다. 미국 유니버설영화사의 <명금 The Broken Coin>(프란시스 포드, 1915)이 1915년과 1916년 각각 일본과 조선에서 공개되며 연속영화는 큰 인기를 끈다.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1919년 프로그램을 보면, 대체로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의 신극좌가 올리는 신파극 공연, 희극영화 2권, 연속활극영화 2편(4권)이 연달아 상영되었다. 당시 단성사의 경영자 박승필은 미국 연속영화에 열광하는 조선인 관객들을 보며, 서구 활극의 조선식 버전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 현실적인 모델은 1915년경부터 조선에 소개된 일본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다가,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내려오면 자동차 추격전이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이 차에서 내려 격투할 때쯤, 다시 스크린이 올라가고 이번에는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직접 격투극을 벌이게 된다. 박승필은 5000원이라는 거액을 투자, 극단 신극좌를 이끌고 있는 김도산에게 연쇄극의 연출과 각본을 맡겼고, 드디어 조선판 활극이 필름으로 빛을 보게 된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김도산 그리고 ‘신파연쇄활동사진’ <의리적 구토>
김도산은 1911년 임성구가 이끈 혁신단의 배우로 신파연극을 시작했다. 1917년 개량단을 조직하며 독립해, 배우뿐만 아니라 연출도 겸하게 된다. 그의 전성기는 1919년 신극좌를 창립하고 박승필과 조우하면서 시작된다. 1919년 6월 박승필은 김도산을 오사카 소재 극장으로 파견한다. 그 극장은 단성사의 외화 수급에 특약 관계에 있던 일본의 덴카쓰(天活,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 상영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사카 흥행의 최전선이던 영화, 연예의 전당 라쿠텐치( 天地)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전기응용극(키네오라마)을 견습하고 기계도 구입해 돌아온다. 그리고 1919년 9월 한 달 동안 <의기남아> 등의 신파극을 ‘비나 천둥번개’ 같은 박진감 있는 무대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전기응용으로 성공시킨다. 그리고 김도산은 박승필의 다음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연쇄극 <의리적 구토>다.
박승필이 투자하고 김도산이 연출을 맡고 신극좌 일행이 출연했지만, 활동사진을 성립시키는 근본 조건인 촬영은 일본 덴카쓰의 촬영기사와 카메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영화의 태생 역시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광고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의리적 구토>는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노량진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배경으로 전차, 기차, 자동차 등 서구의 신문물을 활용한 활극 장면이 촬영됐다. 조선인 관객들의 전례 없는 환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당시 기사나 광고에 의하면 <의리적 구토>는 ‘신파연쇄(극)활동사진’으로 명명되며, 두 가지 점이 강조됐다. 먼저 ‘실연이 적고 사진이 많음’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서양식 활동사진’처럼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연쇄극이 비록 완전한 극영화는 아니었지만, 서구의 활동사진 특히 활극 장르를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조선의 초기 영화(early cinema) 실천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또한 <의리적 구토>가 상연되기 전, 실사 필름 <경성전시의 경>(1919)이 마치 극영화의 설정 쇼트(establishing shot)처럼 보여지며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은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에는 임성구의 혁신단이 만든 “기차와 자동차의 경주와 강물에 떨어지는 쾌활과 기타 서양인의 집 삼층 위에서 격투하다가 악한을 그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대한 대활극”(「매일신보」 1920.4.28) <학생절의>(1920)가 실연은 적고 사진은 서양풍으로 제작되어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을 이어갔다. 영화와 점점 가까워졌던 당시 연쇄극 필름의 분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김도산의 연쇄극 <춘화>를 소개하는 기사(「매일신보」 1920.7.2)에 의하면 사진이 실연보다 많은데, 3000여 척이나 된다고 적는다. 16프레임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50분에 달하는 긴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즈음 우미관에서는 이기세의 문예단이 만든 연쇄극 <지기>로 응수했다. <지기>는 촬영도 조선인이 처음 담당하게 되는데, 그 담당자는 바로 덴카쓰의 고사카촬영소(小阪撮影所)에서 견습하고 돌아온 이필우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인 최초의 촬영기사로 기록되었다.
극영화의 등장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은 1919년 10월부터 1922년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고 흥행했다. 일본에 비해 이처럼 압축적으로 진행된 이유는 1923년을 전후해 본격적인 무성극영화가 등장하는 데 있다. 그사이 연쇄극의 개척자인 김도산과 임승구도 운명을 달리한다. 김도산은 1921년 7월 31세의 나이로, 임성구 역시 11월 35세를 일기로 요절한다. 김도산의 사인은 연쇄극의 활극 장면을 촬영하며 몸을 아끼지 않은 탓으로 전해진다.
1923년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모두 필름으로 소화한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선보인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계몽을 목적으로 만든 관제영화이지만, 윤백남이 각본과 감독을 맡고 조선인 배우들이 출연한 것에 영화사적 무게가 실린다. 이 영화를 통해 최초의 스타 여배우 이월화도 탄생했다. 당시 <월하의 맹서>는 2권, 2000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러닝타임이 33분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선 고전을 원작으로 한 <춘향전>(조천고주, 1923)과 <장화홍련전>(김영환, 1924)이 이어지며, 조선 무성영화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게 된다. 전자는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의 동아문화협회 제작으로 조선인 변사 김조성이 주인공을 맡았고, 후자는 단성사의 박승필이 이필우를 촬영기사로 등용해 만들어졌다. 각각 9권과 8권으로 장편 극영화의 길이도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일본인 흥행사의 자본과 기술의 주도, 조선영화인의 자생적인 움직임이라는 조선 무성영화 시기의 제작 구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일본인 제작사의 영화들을 통해 조선 무성영화의 걸출한 한 인물이 준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