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느-쥘 마레와 크로노포토그래피 1890년 11월 3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6-07-05조회 8,174
약간의 머리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는 「영화천국」 48호(2016년 3/4월호)에 ‘영화사의 순간들’이라는 글을 썼다. 이미 쓴 것처럼 그 글은 아카데미 안에서 영화의 역사를 다룰 때 사용하는 방법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단지 역사적 사실과 기록들만을 공유했을 따름이다. 그 글은 ‘시네필 입문 가이드’라는 특집 일부였으며, 나는 오랫동안 역사(Histoire)란 이름 아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서로 다른 이야기들(les histoires)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시네필 자리에서 다시 써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제목도 영화사(映畵史)가 아니라 영화사의 순간들, 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간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나는 자기가 본 영화의 경험을 가지고 완전하게 ‘사적인 관점에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의 시네필 역사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새로운 방점들. 새로운 구두점. 새로운 해석. 혹은 의도적인 무시. 물론 공식적인 역사의 서술은 아카데미에 맡겨놓으면 된다.

하지만 이 방법이 순전히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지만 나는 세계영화사 전사(全史)를 읽기 전에 시대별이나 장르별, 혹은 국적별, 때로는 한 감독의 전기를 먼저 읽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잡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체의 관점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때 세계영화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국지적으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상황에서도 불균등복합 상태로 한 편의 영화로 나타났다. 각자의 전투. 각자의 창조. 게다가 이 네트워크는 시간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경칩을 벗어나 있었다. 영화의 역사는 수많은 사건의 거대한 아카이브일 수밖에 없다. 물론 세계사 안에서 영화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그리고 그건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결국, 영화사는 영화 안에 (다소 따분한 표현이지만) 중층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사는 영화들의 별자리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사의 순간들이라기보다는 영화들의 순간을 다시 배치해보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세 가지 기술적 난점이 남아 있다. 하나는 물론 「영화천국」이 1년에 6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나는 호마다 하나의 사건을 쓸 생각이기 때문에 사실 이 연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 내가 끝내지 못하면 누군가 이어서 쓰면 된다. 나는 단지 시작한 사람이다. 진짜 내 소망은 이 연재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 창조되는 사건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행진하는 연재를 보고 싶다. 두 번째, 한국영화사의 순간들을 여기에 섞는 순간 약간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뭐랄까, 매개 변수가 다르므로 근거의 지평 자체가 상대적일 수 있다. 나는 한국영화사의 순간들이 독립적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건 또 다른 누군가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 영화사의 순간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단지 미학의 순간만을 따라나서지 않을 것이며, 또한 기술사를 쓸 생각도 없으며, 그렇다고 산업의 역사를 나열할 생각도 없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뒤엉켜 있으며 어디서 어디까지 서로의 선을 그어야 할지 애매할 때가 있다. 나는 차라리 이 세 가지의 순간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범주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들은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을 담은 카메라
영화사의 순간을 어디서 시작하느냐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 초기 영화에 대한 연구는 1558년 지오바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정식화한 저서 「자연의 마술」까지 데려다준다. 그런 다음, 긴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사진’을 작동시키는 기계들이 등장했다. 1834년에 조에트로프가 발명특허를 얻었고, 1877년 프락시노스코프가 만들어졌다. 물론 그 사이에 1839년 다게르의 사진 발명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일일이 열거할 여유가 없다. 그 대신 ‘언제 사진은 영화가 되었는가?’라고 질문하고 싶다. 영화는 사진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거기서 어떤 질적 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잊으면 안 된다. 영화는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은 영화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반대로 사진이 운동을 시작할 때 거기에는 신비로운 도약이 우리를 맞이한다. 사진에 물리적 시간이 부여될 때 거기에는 하나의 운동이, 아름다운 운동이, 그 안에서 우리가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시간을 상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또 다른 시간이 발생하는 것이다.

에티엔느-쥘 마레는 1890년 11월 3일 월요일 셀룰로이드에 인화한 사진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연속적으로 돌려보았다. 1초에 10장에서 50장 사이의 연속 촬영된 이미지의 사진을 ‘상영’했다. 마레가 여기서 상영한 ‘활동사진’의 주인공은 조수였던 조르쥬 드므니의 연속된 행위였다. 물론 이 상영회는 과학적 발명을 발표하는 자리였으며, 훗날 이 장면을 ‘과학적 쇼트’라고 불렀다.

처음에 마레는 혈액 순환에 대해서 연구했고, 점점 그 분야를 넓혀나갔다. 그러면서 심장박동을 연구하다가 근육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고, 그 과정에서 점점 ‘운동’이라는 물리적 활동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여러 종류의 동물을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그 관찰을 담기 위해서 1882년 크로노포토그래피라는 총과 같은 모양의 카메라를 만들게 되었다. 사실상 이 카메라는 얼핏 보면 마치 총과 같은 모양새인데 이걸 마치 대상을 향해 서서 총을 쏘는 자세로 들고 1초에 12프레임을 촬영했다. 사진은 매우 훌륭한 수준을 유지했으며 때로 고속촬영을 할 때는 1초에 50프레임까지 찍을 수 있었다. 이때 마레는 고양이의 착지에 관한 유명한 발표를 했으며 개, 말, 양, 당나귀를 찍었고, 마이크로스코프를 이용해서 벌레들도 찍었다. 이 시기에 거의 같은 방법으로 연구한 사람은 말이 달릴 때 네 발이 동시에 착지한다는 발표를 한 에드워드 머이브리지가 있다. 아마 이 발표 때문에 그가 더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에티엔느-쥘 마레를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이 발표를 한 다음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 에티엔느-쥘 마레가 조심스럽게 이 발명품의 미래를 예언한 대목 때문이다.
“지금은 이 발명품이 과학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만 언젠가 이 기계는 자신이 가진 시적 기능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술적인 어떤 창조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동물의 운동들을 찍으면서 이상하게도 운동을 찍었을 뿐이지만 나중에 다시 보면 내가 찍지 않은 어떤 시적인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티엔느-쥘 마레는 영화가 예술이 될 것을 예언한 첫 번째 사람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직 남아 있는, 그가 찍은 짧은 영상들은 매우 아름다우며 어떤 점에서 마레는 영화 안에서 사진의 순간을 남겨놓고 싶어 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1905년 5월 15일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뤼미에르와 멜리에스가 서로의 영화를 만들고 난 다음 이제 막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말이 실현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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