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어]유성영화의 태동부터 ‘짐머레스크’까지 ① 영미권의 영화음악

by.문상윤(영화음악 수집가) 2016-06-01조회 2,083
유성영화의 등장과 영화음악의 황금기
지금은 어느 나라보다 영화음악이 성행하는 할리우드지만, 정작 영화음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유럽에 비해 대략 10년 정도 뒤처진 1915년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908년 생상스가 <기즈 공작의 암살 L’assassinat du duc de Guise>이란 영화를 위해 처음 작곡을 했고, 그보다 앞선 1902년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에서도 오리지널 스코어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대부분 초창기 영미권 극장에서는 상영되는 영화의 분위기나 드라마적인 상황에 맞게 고용된 극장의 피아니스트 또는 오케스트라가 기존의 음악을 다양하게 연주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915년에 개봉한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이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대중적인 인식과 제작자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영화음악이 영화 관람이란 행위에 스펙터클한 체험을 이끌어내고 감동을 선사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휘청거리던 유럽과 달리 미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에 따라 영화관은 더욱 스케일이 커져갔다. 1920년대의 대규모 극장들은 50~60인조의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있었다. 이는 유지 비용 문제와도 직결됐고, 제작사들이 유성영화 개발에 눈을 돌린 계기가 되었다. 1927년 <재즈싱어 The Jazz Singer>의 성공으로 유성영화의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인한 후 주제가를 활용한 뮤지컬이 우후죽순 쏟아졌고, 대공황을 맞았음에도 할리우드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영화음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28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 Steamboat Willie>는 화면의 동작과 음악 및 음향효과를 일치시키는 미키 마우징 기법을 제시해 무드음악으로만 작용하던 음악적 사용을 획기적이고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에 바그너의 음악적 활용을 도입한 막스 슈타이너의 등장으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음악이 탄생하는데, 이를 혁신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1933년 개봉한 <킹콩 King Kong>이다.

당시에는 이야기의 연속성을 강화해준다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음악을 영화의 중요 요소로 취급했고, 그 때문에 그 무렵의 영화음악은 음악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활용했던 19세기 오페라, 특히 바그너의 악곡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연속적인 멜로디로 사건을 진행하고, 라이트모티프(Leitmotiv)로 인물들의 생각과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영상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막스 슈타이너에 의해 발전된 이 작법을 위해 대규모 스튜디오들은 앞다투어 고전음악에 익숙한 유럽권 작곡가들을 고용했으며,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와 프란츠 왁스먼, 미클로스 로자와 드미트리 티옴킨, 브로니슬로 카퍼, 한스 J. 솔터, 알베르트 콜롬보 등이 등용돼 활약했다. 이들이 전면에 나선 193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가 영화음악의 황금기였는데, 이때를 바탕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일찌감치 영화음악가가 직업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작곡가들의 세대교체와 영화음악의 세분화 다양화
그러나 TV가 등장하고,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진 1950년대부터 음악은 좀 더 세분화•다양화되기 시작했다. 12인치 레코드의 대중화와 주제가의 폭발적인 인기로 사운드트랙이 본격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영화와 음악 산업은 더욱 긴밀하게 이어졌고, 상업적인 시장 또한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전적이고 정형화된 심포닉 사운드의 영화음악은 자연스럽게 위력을 상실했고, 때마침 황금기를 구가한 1세대 작곡가 몇몇이 사망하며 세대교체를 이루게 됐다.

이때 등장한 알렉스 노스와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로젠만과 앙드레 프레빈, 앨머 번스타인, 제리 골드스미스, 존 윌리엄스와 같은 2세대 작곡가들은 영화음악을 학문적으로 전공한 세대였고, 새로 불기 시작한 재즈와 무조주의, 불협화음과 전위성 등을 영화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한편, 한쪽에선 팝적인 감성과 제3세계 소리를 이식한 헨리 맨시니나 존 에디슨, 존 배리와 모리스 자르 등이 새로운 사조를 이끌었다.

1960년대에는 메이저 영화사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상업적인 이유로 오리지널 스코어가 외면받는 대신 록/팝 음악의 사용과 클래식의 재활용이 빈번해졌다. 아울러 니노 로타와 미셀 르그랑, 프란시스 레이나 조르주 들르뢰, 엔니오 모리코네와 같은 유럽 작곡가들이 다시 유입되며 다양한 색채를 나타냈다.

1970년대에 불어닥친 재난영화 열풍의 가운데 서 있던 존 윌리엄스는 잠깐 사라진 심포닉 사운드의 부활을 시도했는데, 이를 증폭시킨 건 블록버스터의 효시인 <죠스 Jaws>(1975)와 <스타워즈 Star Wars>(1977)의 상업적인 성공이었다. 오락적인 측면에서 스펙터클한 사운드를 부각한 그의 스타일은 다시 고전의 맥락을 이어나갔고, 1980년대 블록버스터의 유행에 공식처럼 활용되며 제임스 호너와 알란 실베스트리, 대니 엘프만, 토머스 뉴먼과 제임스 뉴톤 하워드, 하워드 쇼어 등 3세대로 불리는 다양한 작곡가를 양성시키며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또한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한 신시사이저의 발달은 예산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준 영화음악계의 혁신이었고, 이를 활용한 반젤리스나 조지오 모로더는 1980년대 영화음악계에 중요한 비전을 보여줬다. 1990년대 한스 짐머에 이르며 신시사이저와 오케스트라를 결합한 사운드는 이른바 ‘짐머레스크’라 불리는 스타일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또한 필립 글래스와 마이클 니먼의 미니멀리즘도 다른 대안으로 떠올랐다.

현재 이런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계승할 작곡가로서 단연 눈에 띄는 건 ‘포스트 존 윌리엄스’라 불리는 마이클 지아키노다. 그는 명료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드라마틱한 구성, 대규모 심포닉 사운드로 막스 슈타이너로부터 존 윌리엄스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링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짐머 스타일을 적절히 수용하면서도 제리 골드스미스를 연상케 할 만큼 파워풀한 사운드를 구축해 마블 유니버스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브라이언 타일러 역시 두각을 나타내는 신진 작곡가 중 하나다. 이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게임과 애니메이션, TV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자신이 직접 연주•프로듀싱까지 도맡는 인재로 새로운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내일을 책임지고 있다.

문상윤이 선택한 단 한 곡의 오리지널 스코어 엔니오 모리코네 ‘L’Ultima Diligenza Di Red Rock’ - <헤이트풀 8 The Hateful Eight>(2016)
오랜 기간 아카데미 무관으로 남아 있던 87세의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6번의 도전 끝에 오스카를 안겨준 <헤이트풀 8>은, 그의 최고작이라 할 순 없지만 그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를 세상에 알린 낭만적이고 독창적인 마카로니 웨스턴 사운드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여전히 키치적이고 강렬한 사운드로 영상을 지배한다. 그는 이런 배신과 음모, 약탈과 도륙의 음악에 익숙하다. 오보에와 바순, 실로폰 그리고 묵직한 스트링과 퍼커션, 코러스가 어우러진 불협화음이 빚어내는 긴장과 어둠의 사운드는 말 많고, 삽입곡 많은 타란티노 영화에서도 자기 지분을 확보하며 서부극의 외형을 뒤집어쓴 밀실 추리극에 긴장과 스릴을 더한다. 단순하지만 반복적•점층적으로 불안과 의혹의 징조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엔니오의 테마는 이 정 붙일 곳 없는 악당들의 이야기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능청스러운 타란티노의 화술 뒤에 웅크린 진짜 속내를 드러내주는 건 바로 이 음악의 힘이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