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김기덕 감독의 작품 평가는 삼가겠다. 다만, 그 당시 지면을 장악한 기자들이 얼마나 독선적이었나를 말하고 싶다. 영화는 감성예술이며, 그 완성도가 생명이다. 그런데 그때 평자들은 영화를 소설처럼 생각했다. 몇 종류의 필름을 사용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특정인을 우상처럼 예술가로 만들고 나머지 영화를 통속으로 매도했다. <오발탄>은 명품이고, <하녀>는 괴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발표된 한국영화 순위는 <하녀>가 일등이고 <오발탄>은 그 아래다. 그때 영화 현장에 있던 우리들은 그것을 예측했고 신상옥, 이만희, 유현목, 김기덕, 김기영 감독을 나란히 평가했다.
김기덕은 김성환 교수(세브란스 의전)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6・25 때 피란지 부산에서 가족을 위해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17세 소년이었다. 형제들은 모두 교수가 되었는데 그는 영화감독이 되어 장남처럼 집안을 돌보았다. 작년 가족묘지를 만들고 족보를 열람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의 조부가 내장원경(內藏院卿) 종2품 김종원(金宗源)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높은 벼슬인지 모르지만 명성황후와 늘 대면하는 왕가의 살림꾼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충무로에서는 길에서 감독들이 서로 스쳐도 타인처럼 지냈는데 어느 해 설날 이만희 감독이 찾아와 장가간 지 얼마 안 되는 김기덕 신혼집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술 한 통을 다 마시며 떠들다가 말이 통했는데 그해 여름 뚝섬에 들놀이를 갔다가 의형제가 되고 말았다. 이만희도 그랬지만 지금도 김기덕은 시도 때도 없이 형님을 부른다. 스무 살이 넘던 해 김기덕은 전창근 감독의 권유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데 공연하던 미군병사들과 키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고심하게 되고, 감독의 권유로 편집실로 갔다. 그 후 얼마나 되었는지 내가 육군 대위를 달고 국방부 영화과에 근무할 때 김소동 감독의 애송이 조감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데뷔작은 <5인의 해병>. 중부경찰서 앞 극동영화사 전속이 되어 작품마다 히트를 쳐 그 인기는 당시 톱스타 엄앵란을 능가,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있었을 정도였다. 70여 편의 영화를 만들어 제작자 차태진을 부자로 만들어놓고 그가 서울예술대 교수로 간 것을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영화 이론을 마스터하며 수많은 영화인 자제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시켰다. 아마 충무로에 동상을 세운다면 김기덕이 제일 먼저 선택될 것이다. 지금 그는 대한민국 예술원 제4분과 회장을 맡아 탁월한 행정력과 넘치는 인간성으로 회원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김기덕은 진짜 영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