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장르를 버무린 대중영화의 정석 노다지

by.김성훈(씨네21 기자) 2015-11-24조회 2,255

<킬 빌 Kill Bill>에 영향을 준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 떠올랐을까. <노다지>(정창화, 1961)도 액션 활극인 줄 알았다. 제목만 보면 노다지에 눈이 멀어 금광에서 사투를 벌이는 남자들의 욕망과 배신 그리고 우정을 다룬 이야기거나, 노다지를 발견했지만 여자의 꾐에 빠져 가산을 홀라당 날려버린 빈털터리 남자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상상과 아주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더 이야기가 방대하고, 액션뿐만 아니라 누아르, 가족 드라마, 멜로,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대중영화다.

한때 주먹깨나 썼지만 지금은 마음을 바로잡고 선원이 된 동일(황해). 반년 만에 고향 부산에 돌아온 그는 새 가정을 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동일은 길에서 ‘사금왕’이 된 운칠(김승호)과 부딪쳐 시비가 붙는다. 20년 전에 금광에 미쳐 어머니와 자신을 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금광의 ‘금’자라면 치를 떠는 그다. 젊은 시절 운칠은 애인(윤인자)을 사장에게 빼앗긴 뒤 다른 여자(조미령)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 영옥을 낳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까닭에 가정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달수(허장강)와 함께 금을 캐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어린 영옥을 부양하기 위해 석탄을 캐면서 하루를 연명하던 운칠의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서 운칠은 영옥을 데리고 다시 산에 간다. 하지만 산을 타는 데 걸리적거리기만 한 딸을 짐이라 여겨 어린 그녀를 산에 버려두고 떠난다. 그로부터 20년 전이 지난 뒤 운칠과 달수는 금광을 발견한다. 금광에 눈이 먼 달수는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금을 캐다가 동상에 거리게 되고, 다리를 잘라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는 운칠에게 자신의 아들을 찾아 금의 절반을 나눠주고, 자신의 엽총을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운칠은 자신의 딸 영옥과 달수의 아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가 사금왕이 됐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옛 애인, 애인의 사랑을 차지했던 사장, 사설 탐정(김희갑) 등 온갖 사람들이 그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온다. 한편, 영옥(엄앵란)은 황돼지(박노식)가 이끄는 폭력 조직의 단원이다. 밤늦은 시간, 길 가던 남자를 꾀어낸 뒤 흉기로 위협해 그가 가진 돈, 시계 등을 빼앗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동일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조직에서 나오려고 한다. 황돼지와 부두목 애꾸(장동휘)는 그녀에게 사금왕 운칠의 재산과 금광 지도를 훔쳐오면 조직을 나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영화는 금(광)에 눈이 먼 운칠을 비롯해 폭력 조직의 황돼지와 애꾸, 옛 애인, 전 사장, 사설 탐정 등 운칠의 재산을 파리떼처럼 호시탐탐 노리는 여러 인간과 그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의 삐뚤어진 욕망을 적나라하게 펼쳐낸다.

시간의 간극을 빠르게 뛰어넘는 영화적 유희

<노다지>는 대중영화로서 여러 미덕을 갖췄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운칠, 동일, 영옥의 사연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오가며 전개된다. 다소 복잡한 구조임에도 정창화 감독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시간의 간극을 재빠르게 뛰어넘는다.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액션, 누아르, 가족 드라마, 멜로, 코미디 등 여러 장르가 배턴터치하듯 이어지는 것도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은 비결 중 하나다. 가령 운칠의 과거 가족 이야기는 가족 드라마, 서울 시내 어두운 뒷골목에서 영옥이 동료 조직원과 함께 술 취한 남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장면은 필름 누아르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동일과 영옥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시퀀스는 영락없는 멜로드라마며, 동일이 황돼지 일당에게 끌려가 집단 구타를 당하는 시퀀스는 액션 장르다. 젊은 시절 운칠을 떠났다가 사금왕이 되어 돌아오자 다시 마음을 여는 옛 애인은 팜파탈 그대로다. 또, 김희갑이 연기하는 사설 탐정이 가짜 동일과 영옥을 운칠 앞에 데리고 오고, 호시탐탐 운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은 무척 유머러스하다(잠깐 등장해 또박또박 대사를 치고 빠지는 구봉서도 영화의 깨알 같은 재미다).

이야기 곳곳에 정교하게 배치된 영화의 장치들은 정창화 감독이 액션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 능수능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화려한 출연진의 탄탄한 연기도 이 영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이자 서사를 탄탄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금을 캐기 위해 20년 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산 운칠과 달수를 각각 연기한 김승호와 허장강이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당돌한 청년 동일을 연기한 황해는 키는 작지만 ‘상남자’의 매력이 넘친다. 길에서 부딪쳤다는 이유로 초면인 운칠에게 주먹부터 날리질 않나, 자신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흉기로 위협한 영옥에게 “당신같이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가 강도짓을 하다니 놀랐는걸”이라고 말하며 한 손으로 들어올려 바다로 던져버리려고 하질 않나. 이렇게 터프하다가도 영옥이 궁지에 몰리자 손수 구해주는 기사 같은 면모도 갖춘 남자다. 동일의 대사대로 남자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엄앵란은 귀엽고 풋풋하다. 정창화 감독은 동일과 영옥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바닷가에 가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조차 단순한 인서트컷이 아닌 두 남녀의 정보를 관객에게 알리는 데 활용한다. 박노식과 장동휘, 당대의 터프 가이 두 명은 영화의 어두운 공간을 장악하는데, 필름 누아르 장르로서 꽤 압도적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김희갑과 구봉서는 관객의 배꼽을 들었다 놨다 한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찰떡같은 호흡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면 눈이 정말 호강한다. 황금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당시의 인물들을 그린다는 점에서 <노다지>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무엇보다 액션의 장인으로만 알고 있던 정창화 감독이 여러 장르의 장치들을 잘 활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점에서 <노다지>는 ‘웰메이드 장르영화’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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