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의 영화사적 가치 이규환 감독의 해방 후 네 번째 연출작 <해연(일명: 갈매기)> 발굴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5-07-31조회 2,906

이규환 감독의 1948년 작품 <해연(일명: 갈매기)>(이하 <해연>, 9롤, 75분)이 발굴되었다. 해방기 이규환 감독의 대표작으로, “해방 후 최초의 문예영화”(광고, <경향신문>, 1948.11.21), 배우 조미령의 데뷔작 등으로 수식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이규환은 일제강점기의 연출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1932)와 대표작 <나그네>(1937) 등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감독으로 평가되지만, 그동안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한 연구는 반쪽밖에 진행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연출작(1945년 이전: 8편, 6・25전쟁 이전: 4편, 1950년대 이후: 8편) 20편 가운데,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되어 있는 작품은 감독 은퇴 기념작으로 제작된 <남사당>(1974)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번 발굴은 이규환 감독 영화의 첫 번째 수집이라는 측면에서, 또 그간 해외 필름 아카이브를 통해 일제 시기 극영화 발굴에 주력했던 한국영상자료원의 작업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의 해방기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연>의 제작 과정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조선일보>, 1948.1.2), 1948년 10월에 완성되었다(<경향신문>, 1948.10.22). 해방 공간의 영화계가 영화기자재와 필름이 극도로 부족했던 형편이었음을 떠올린다면, 1년여의 오랜 제작 기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35mm 발성영화로 완성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영화는 부산 소재의 예술영화사가 제작했고, 프로듀서는 이철혁이었다. 그는 <춘향전>(이규환, 1955)의 흥행 성공으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기를 촉발한 인물이자, 배우 조미령의 남편이기도 하다. 이규환의 생전 기록에 의하면, 세트 촬영은 동래온천 한 마을의 주민시설에서 진행되었다. 촬영기사는 일제강점기 이규환의 <새출발>(1939)에서 함께 작업했던 양세웅이다. 그는 광복 이후 이규환의 작품 4편에 모두 참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해연>은 영화음악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원로평론가 박용구는 당시 이 영화가 “영화음악의 일기원(一紀元)”을 이뤘다며, “해방 전후 작품 중에서 가장 좋게 보는 이유는 작품이 성실한 점과 아울러 음악이 영화를 살린 조선 최초의 작품인 탓”(<경향신문>, 1948.11.25)이라고 쓸 정도였다. 영화음악은 작곡가 정종길(6・25전쟁 이후 월북)이 맡았는데, 서울교향관현악단의 연주와 신향합창단, 한성중학합창단 등 100여 명의 합창을 녹음한, 이후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도 보기 드문 오리지널 작업이었다.

건국판(建國版) <집없는 천사>

영화 <해연>의 배경은 바닷가의 한 소년감화원이다. 감화원은 고아나 부랑소년을 모아, 혹은 미결감에 해당되는 소년들을 형무소에서 분리해 집단 생활을 시키며 농업과 공예 등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당시 기사(<경향신문>, 1947.3.6)로 미루어 부산 근처의 경남소년감화원(소년학교)이 영화의 배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감화원 선생 윤정애(남미림)와 약혼자 오철수(박학), 그녀의 동생 정숙(조미령) 그리고 감화원 소년 수길(최병호) 등이다. 영화는, 건국도상의 중요한 국면에 모리배 짓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철수에 실망한 정애가 그를 뿌리치고 감화원으로 떠나는 서울역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영화는 1년 후 감화원의 일상을 담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정숙이 계모와 살기 힘들어 감화원을 찾아오고, 말썽쟁이 수길은 정숙을 보고 헤어진 누나로 착각한다. 수길은 정숙에게, 역시 계모 밑에서 살다 누나가 집을 나가고 자신마저 가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후 정숙은 수길을 친동생처럼 생각하며 지내지만, 정애는 감화원 전체 소년들에게 좋지 않다며 서울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약혼자 철수가 정애를 찾아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그가 떠나는 배에 정숙도 같이 오른다. 눈물을 흘리는 수길에게 정애는 큰 누나가 있지 않냐며 위로한다.

영화사적 연구 가치

그동안 우리가 이규환 감독의 영화 세계를 전혀 살펴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돌아온 것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좁게는 이규환의 일제강점기 영화 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는 식민지기 조선영화와 1950년대 한국영화 사이의 과도기적 상황을 주목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연>에서 가장 주목할 장면을 뽑자면, 감화원 소년들의 단체 노동 신(3롤)과 수길의 회상 신(6롤)일 것이다. 전자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일꾼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장면으로, 곡괭이로 땅을 파는 소년들의 모습과 세찬 파도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가운데, 웅장한 남성 합창단의 노래가 입혀진 ‘소비에트 몽타주’ 스타일의 장면이다. 후자는 가출한 수길이 부랑소년이 되어 겪는 대도시 서울의 위험한 풍경을, 속도감 있는 쇼트 배열의 ‘몽타주 시퀀스’로 구축해낸 장면이다. 한편 이번 <해연> 발굴은 영화사 연구가 얼마나 필름 아카이브 본연의 작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4년 전 고베영화자료관의 야스이 요시오(安井喜雄) 관장이 처음 입수한 <해연>의 원본 프린트는 나이트레이트(가연성) 필름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본 리더 부분에 찍힌 검열 표시다. 사진 1, 2에서 볼 수 있듯이, 위는 공보처 검열제(公報處 檢閱濟), 아래는 연합국군최고사령부(SCAP/GHQ) 소속 민간검열지대(CCD)의 직인이 찍혀 있다. 그리고 ‘N1254’라는 붉은색 페인트 글씨가 쓰여 있다. 향후 CCD의 검열 목록 조사가 진행되면, 이 영화에 대한 추가 정보가 더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해연>은 문교부 추천으로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처음 개봉되었는데, 이후 부산에서 상영되다 당국에 압수되는 사건(<조선일보>, 1948.12.24)이 발생한다. 12월 20일부터 인천 동방극장에서의 상영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 영화는, 미군정청 공보부에서 하던 검열 업무를 대한민국 정부의 공보처 영화과가 맡게 된 1948년 10월에 검열에 통과했다. 그렇다면 <해연>은 왜 압수되었을까. 하나의 가설로, 영화 관계자의 월북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연배우 박학은 1948년 8월경 월북해, 북한의 첫 번째 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한 바 있다. 그 이후 이 영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일본에서 발견되었을까. <해연> 원본 프린트의 검열 직인에 대한 조사가 더 많은 사실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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