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을 생각하면, 캄캄한 밤바다에서 표류하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1967년 가을, <만선> 촬영을 마치고 통영을 향하던 중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멈췄다. 통영 부두에 근무하는 해안경비들도 모두 떠난 새벽 2시 즈음으로 기억한다. 만약 암초를 만났다면 배에 타고 있던 50여 명의 스태프는 소리 소문 없이 수몰되었을 것이다. 배우 변기종은 뱃머리에서 무사히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고, 김승호는 “하나님! 당신 너무하잖아. 우린 점심도 못 먹고 촬영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인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거야!”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시 가정 파탄으로 힘겨운시기를 보내고 있던 주증녀와 허장강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당돌한 남정임은 서울 촬영을 위해 매니저와 다퉜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묵묵히 기다렸다.
<만선>은 명동에 있던 두 개의 양복점, ‘송옥’과 ‘뉴스타일’이 호황을 누리던 당시, 양복점 이종벽 사장의 투자를 받아 제작한 영화다. 천승세의 연극을 기반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명동극장에서 보았던 연극은 배우 이낙훈, 박근형이 신인으로 나왔고, 남해고도 어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선주에게 먼저 배 값을 지불해야만 했던 가난한 어민들 에게 ‘만선’은 꿈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배 한가득 생선을 싣고 돌아와 가족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것이 어부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이렇게 <만선>의 큰 구조는 기본적으로 노사(선주와 어민) 문제를 바탕으로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김승호 가족의 생활이 그려졌다. 그 안에서 허장강과 김칠성이 대립하고, 박노식과 남궁원은 싸우며, 신영균과 남정임은 사랑을 한다. <만선>은 1967년 작품인데, 1963년 <굴비>와 1965년 <갯마을>이 꽤 흥행해 이 작품 역시 외 출품을 준비했다. 하지만 영천의 가난한 마을을 여과없이 폭로한 <굴비>가 ‘한국의 수치’라며 출품이 좌절된 후 정부가 예민하게 주시하던 시기라서인지, 당시 민감했던 노사 갈등을 최소로 축소시켰음에도 <만선> 역시 출품이 좌절되었다.
전조명과 장석준은 내가 촬영감독으로 데뷔시킨 서라벌예대 동기들이다. <갯마을>의 촬영을 맡았던 전조명을 의식한 장석준은 <만선>으로 돋보이는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운동신경이 둔해 배에서 내릴 때 늘 바다에 풍덩 빠지곤했다. 하지만 굼뜨기로는 김승호만 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 역시 하선할 때마다 바다에 빠졌는데, 그때마다 총알처럼 튀어나와 부두 끝에 앉아 있었다. 지난 4월 3일, <만선>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다시 봤다. 당시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배에 올라타 고기잡이를 사실처럼 묘사하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보니 어색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지금봐도 어색함이 없다. 특히, 주증녀가 실성해서 아이를 바다에 버리고 남편의 매를 맞는 장면은 연기라고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남자의 주먹세례 그 자체였다. 48년 만에 다시 본 <만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에게 잊힌,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동료들이 무척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