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정월, 김기덕 감독과 찾은 민경갑 화백의 화실에서 우리는 양 두 마리가 그려진 그림을 선물 받았습니다. 유난히 부드러운 털이 시선을 끌었는데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지요. 이만희 감독 당신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이 감독은 양띠였죠. 그래서인지 ‘삼주집’에서 이 감독에게 앞으로만 가지 후퇴는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삼주집’ 하니 당신과의 일화 하나가 더 생각납니다. 당신이 월남에 <얼룩무늬 사나이>(1967)를 찍으러 떠나기 전 전옥숙이 베푼 환송 자리였지요. 출산 시간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주’가 아닌 ‘삼주’를 주장하던 모녀 점쟁이(그 어미는 어느 고관의 점을 잘못 봐 곤장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었지요.)에게 한 여배우를 월남에 데려가야 할지 말지를 놓고 점을 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실 그때 듣고만 있었는데 그날 밤 그 여배우의 전화를 받고 세상의 모든 욕을 들었지요. 이 감독이 옆에서 말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런 욕 세례는 난생처음이었습니다. “네가 우리 둘을 갈라놓고 속이 시원하겠느냐”고 소리치기도 했어요. 결국 기를 쓰고 따라갔던 그 여배우는 하늘 배경으로 3컷이 찍힌 필름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제작자 호현찬은 도대체 서울에서 찍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핀잔을 받았습니다. 심란해하던 당신을 위로하러 간 김기덕 감독과 나는 당신과 뚝섬에서 하루종일 술을 마셨고, 그 덕에 우리는 의형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 햇볕 쏟아지는 충무로 길가에서 당신의 조사(弔詞)를 읽으며 가슴이 미어지던 것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영정을 들었던 강대진 감독도, 그 뒤를 따르던 유현목 감독도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떠난 후 40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영화라고 하지만 지금은 철저한 자본경제 시스템의 통제를 받으며, 관객 1000만 명이 넘지 못하면 빠르게 잊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신이나 저의 세대가 단일 극장에서 승부를 내며 애태우던 때가 언제 있었냐는 듯, 현재는 500~600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행복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태프들의 처우는 배우와 제작사가 차지하는 부에 비해 턱없이 열악해 지금도 힘겹지요. 나는 109번째 영화 <침향>(1999)을 찍고 15년간 백수로 지내지만 스스로 땅속으로 가라앉은 향기라고 자위해봅니다.
당신이 떠난 4월, 영상자료원에서는 ‘이만희 감독 40주기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당신의 세련되고 치밀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잠시나마 관객들을 만나게 된 것을 무척 반갑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카메라 앞에서 그토록 화려한 액션을 하던 배우들도, 그 끼가 넘치는 여배우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이와 함께 이만희의 매력도 함께 소생할 것입니다. 경기도 광주 어느 산비탈 먼지바람 부는 당신의 봉분을 보고 가슴 아파했지만 우리도 별수 없이 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유현목 감독이 옆자리라고 좋아하는 김기덕 감독을 보면 허무하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배달되지도 못할 편지 한 장 쓰면서 이만희 감독을 그리워합니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