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대표 여배우의 눈부신 시절 <워킹 걸>

by.태상준(영화전문기자) 2015-01-21조회 3,359
감독 마이크 니컬스가 2014년 11월 19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1931년 독일 베를린 출생으로 향년 83세이니 아주 날벼락 같은 소식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에 완전히 중독됐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국내 개봉되는 신작들은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 영화까지 부지런히 찾아서 봤던 영화의 감독이라 충격의 강도는 셌다.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1997),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1999),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2003)의 제작자와 감독이었던 시드니 폴락과 안소니 밍겔라가 나란히 세상을 뜬 2008년에 이미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강도랄까. 할리우드 영화의 또 한 세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것 같아 맘 한쪽이 헛헛했다.

연출 데뷔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6)와 불멸의 클래식 <졸업(The Graduate)>(1967), 30대의 젊은 잭 니콜슨의 여성편력기 <애정과 욕망(Carnal Knowledge)>(1971), 지금까지 내 모든 이메일과 아이디로 사용되는 고(故)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버드케이지(The Birdcage)>(1996) 등 마이크 니컬스가 연출한 걸출한 작품이 많지만, 내가 마이크 니컬스 감독의 영화에 호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된 직접적인 작품은 그의 1988년 작 <워킹 걸(Working Girl)>이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결합된 직장잔혹사

‘직장 여성’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워킹 걸>은 시고니 위버와 해리슨 포드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1964년 작 <마니(Marnie)>의 헤로인 티피 헤드런의 딸인 멜라니 그리피스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세 명의 주인공 모습이 큼지막하게 자리한 포스터가 처음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고니 위버와 해리슨 포드야 연기력과 지명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할리우드 대표 배우이니 괜찮다. 그런데 멜라니 그리피스? 말이 되지 않는다 싶었다. 전형적인 ‘골 빈’ 블론드 배우로 손꼽히던 멜라니 그리피스는 이전까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침실의 표적(Body Double)>(1984)이나 조나단 드미의 <섬씽 와일드(Something Wild)>(1986) 정도가 주목할 만한 출연작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들도 그의 ‘섹스어필’만이 강조된 작품이다. 균형이 다소맞지 않는 캐스팅이라는 선입견을 갖기에 충분했다.

<워킹 걸>의 이야기는 심플하다. 성공적인 증권 중개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보잘것없는 학벌 탓에 비서 자리에 만족해야 했던 여자가 결국 일과 사랑을 모두 손에 쥐는 식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멜라니 그리피스가 그 여자인 ‘테스 맥길’이고, 시고니 위버는 테스가 뛰어넘어야 할 악독한 여자 상사 ‘캐서린 파커’이며, 해리슨 포드는 캐서린의 전 연인이면서 테스의 ‘백마 탄 왕자’가 될 운명의 ‘잭 트레이너’다. 테스가 근무하는 뉴욕의 한 증권 회사에 아이비리그 출신의 캐서린이 중견 간부로 부임해 오면서 <워킹 걸>은 시작된다. 일 욕심 많고 실력도 있는데 완벽한 외모까지 겸비한 캐서린은 단번에 테스의 롤모델로 떠오른다. 그러나 캐서린이 테스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도용하려 한 사실이 드러나며 둘 사이의 전쟁은 시작된다.

여배우의 발견, 그리고 영화의 음악들

여자의 적이 여자라니, 열렬한 페미니스트라면 질색할 스타일의 영화다. 여전히 학력과 인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워킹 걸>의 결말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이 영화의 장르를 시대착오적인 판타지로 격하시킬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캐릭터 코미디로서 <워킹 걸>은 무척 매력적이다. 일단은 두 여배우의 캐스팅과 밸런스가 환상적이다. <워킹 걸> 이전까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시작으로 더스틴 호프만과 앤 밴크로포트, 캐서린 로스(<졸업>), 앤 마그렛(<애정과 욕망>), 메릴 스트립과 셰어(<실크우드(Silkwood)>(1983)) 등 많은 배우를 미국 아카데미 수상과 후보 지명의 영광으로 이끌었던 감독답다. ‘백치미‘ 여배우였던 멜라니 그리피스는 과거 그의 이미지를 살짝 비튼 테스 역으로 코미디 연기에도 재능이 있음을 입증했으며, 시고니 위버는 <워킹 걸>의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캐서린’으로 과거 그를 감싸던 <에일리언(Alien)>시리즈의 여전사 ‘리플리’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 캐롤 킹, 조니 미첼 등과 함께 1970년대 대표적인 여성포크 뮤지션이었던 칼리 사이먼이 작곡하고 노래한 <워킹 걸>의 주제곡 ‘강아 흘러라(Let the River Run)’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영화음악 중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사족 하나. 최근 개봉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신작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에는 시고니 위버가 람세스의 어머니인 ‘투야’ 역으로 등장한다. <1492 콜럼버스 (1492: The Conquest Of Paradise)>(1992) 이후 무려 22년 만에 리들리 스코트와 재회했다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그 의 역할은 미미했다. 투야는 그저 모세를 미워하는 것이 전부인 평면적이고도 기능적인 캐릭터다. 심지어 모세의 탈출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극 중반 이후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시곗바늘을 25년 전으로 돌려보자. 198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고니 위버는 <워킹 걸>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물론 <정글 속의 고릴라(Gorillas In The Mist: The Story Of Dian Fossey)>(1988)의 인류학자 다이안 포시 역할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보기 드문 더블 노미네이트를 달성했다. 우아한 베이지색 샤넬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고 수상 소감을 준비했을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해의 수상자는 <피고인(The Accused)>(1988)의 조디 포스터와 <우연한 방문객(The Accidental Tourist)>(1988)의 지나 데이비스였다. 또 기회가 있을거라 생각했겠지만 시고니 위버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미국 아카데미 후보 지명을 받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워킹 걸>이 개봉된 1988년이 시고니 위버의 하이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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