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너무 무서워졌다. 아니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장차 엄마가 될 잠재적 엄마들까지 모두 무서워졌다. 최소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확실히 그랬었고, 그 강렬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유난히 막강한 엄마 품에서 태어나고 또 죽는 한국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한, 그 강렬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내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토록 무서울 수 있을까.
이것은 암캐들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도 첨예하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이다. 그 남자에게 며느리가 여자이고 싶은 것만큼, 시어머니도 여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두 여자의 ‘대등한’ 게임이 시작되는 것도 바로 여기다.
아마도 이 영화를 지배하는 참혹한 역설은 바로 여기서 나올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대등한 전투를 시작한다. 둘 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투는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를 무식하게 제압하는 수컷들의 방식이 아닌, 오히려 이빨을 감추고 상대의 허점을 비열하게 파고드는 암컷들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전투도 아니다. 이것은 암투다. 해물탕을 요리하던 식칼이 흉기로 돌변하기 전까지, 시시콜콜한 디테일과 미묘한 뉘앙스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즉각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런 공격.
어떤 영화든 그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이 있다. <
올가미>에서 모두를 경악시킨 그 장면은, 아마도 어머니가 다 큰 아들의 몸을 씻겨주는 장면일 게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남자로 훔쳐온 것이다. 도둑맞았다가 다시 훔쳐온 장난감처럼.
각자 다른 선호도가 있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장면들은 또 따로 있다. 하나는 자신의 방에 들어온 며느리에게 보란 듯이, 시어머니가 웃옷을 벗어서 브래지어로 가려진 가슴을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치 아직 녹슬지 않아서 언제든지 쏠 수 있는 총을 자랑하듯, 마돈나의 미사일 가슴이 디졸브되어 보인 건 나뿐일까? 다른 하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대신 파와 마늘을 동태탕에 넣고서는, 식칼로 푹푹 쑤시는 장면이다. 이 잔혹함은, 아마도 엄마가 여자일 수도 있고, 며느리가 첩일 수도 있고, 그래서 집은 감옥이, 부엌은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역설에 있다. 이것은 자궁의 역설이다. 엄마품은 나를 품기도 하지만, 날 질식시키기도 한다. 태아는 양수에 살기도 하지만, 양수에 빠져 죽기도 한다.
난 가끔씩, <올가미>에서 성별만 바뀐 영화를 상상해보곤 한다. 한집에 아버지와 딸이 살다가, 딸이 남편을 얻어서 들어온다. 아버지와 사위의 전쟁이 벌어진다. 왜 재미가 없을까? 그들은 립스틱도, 브래지어도, 해물탕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