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두 번의 꿈 장면 신상옥 감독의 <동심초>(1959)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4-01-09조회 630
신상옥의 멜로드라마

선 굵은 연출의 거장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후반 몇 편의 멜로드라마를 연출하며 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춘희> <동심초>(1959) 그리고 <자매의 화원>(1959)을 잇달아 흥행 성공시킨 그는, 이후 1960년을 기점으로 ‘영화제국’ 신필름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신상옥의 이 시기 멜로드라마들을 연출 순서대로 살펴보는 작업이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는 신상옥이 195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혹은 이 시기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슬쩍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상옥의 영화 문법이 세련돼가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과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는 각각 프랑스 영화 <배신(Abus de confiance)>(1937) <갈등(Conflit)> (1938)을 원전으로 삼은 영화다. 나 역시 프랑스 원작들을 확인했지만, 신상옥은 원본의 이야기만 가져왔지 ‘데쿠파주(쇼트의 배열)’나 스타일의 질감을 참조한 것은 아니다. 당시 흥행 코드인 ‘신파’에서 서구식 멜로드라마로 방향을 트는 데 우선 알맞은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춘희> 역시 프랑스 작가 뒤마의 소설이 원작임을 감안한다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식민지 영화청년 신상옥이 극장에서 봤을 수많은 버전의 서양영화 <춘희> 중 어떤 영화를 참고했을까 하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동심초>의 매혹적인 두 신(scene)

서구 멜로드라마의 직접적인 참조의 시기를 넘어 빠른 시간 안에 신상옥은 그만의 멜로드라마를 창조해간다. <동심초> <자매의 화원>으로 넘어오면서 그는 서양의 이야기를 밀어두고, 전후 한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선택하는데, 두 영화는 각각 조남사와 방속극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서사의 차원이 아니라 신상옥의 ‘영화적인(cinematic)’ 연출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흥미로운 작품이 <동심초>이다. 사실 이 영화는, ‘신파’라는 당대 대중의 욕망의 물길을 틀어 완벽하리만치 매끄러운 서구식 멜로드라마를, 아니 그만의 멜로드라마를 완성한 <자매의 화원>에 비해, 여주인공들의 눈물도 여전하고 만듦새도 투박한 도상(途上)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신상옥의 세련된 연출이 정점을 찍은 두 개의 신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영화이다. 바로 이 두 신은 고뇌하는 지식인의 페르소나, 김진규가 연기하는 상규의 꿈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전쟁미망인 이 여사(최은희)와 그녀를 사랑하는 김상규다. 물론 여러 인물이 디제시스 속에 얽혀 있다. 이 여사의 딸 경희(엄앵란), 경희의 옛 가정교사 한기철(김석훈), 경희를 탐한 신동일(이민), 이 여사를 마음에 둔 김 사장(김승호), 그리고 김상규의 약혼녀 옥주(도금봉), 역시 전쟁미망인인 상규의 누이 김 여사(주증녀) 등등이다. 핵심은 이 여사와 상규의 사랑이다. 당대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불순하면서도 순결한 사랑, 억지로 순결함으로 남는 사랑의 이야기는 두 개의 꿈 장면을 통해 내밀하게 그려진다. 말하자면 이는 짝짓기에 실패한 한 남성의 신경증에 대한 탁월한 묘사이다.

첫 번째 꿈

전쟁미망인과 약혼녀가 있는 남자의 사랑이 쉽게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이 여사는 양장점 빚을 회사 돈으로 변통해준 상규와 헤어지기 위해 집을 팔기로 결심, 시골 외가로 내려간다.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는 자매 같은 딸 경희(공교롭게 이 여사의 이름은 숙희)가 주소를 건네줘, 상규는 바로 그녀를 찾는다. 이 여사는 전쟁미망인으로 8년 동안 남의 눈치만 봤다며 “욕심대로 한다면 전 당장이라도 김 선생님 품으로 뛰어들고 싶어요.”라고 전제하고, 상규는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결혼하자고 덧붙인다. 그녀는 밤에 ‘봐서’ 상규가 묵는 서울여관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제 흥미로운 쇼트 배열이 시작된다. 이 여사를 기다리던 상규가 살짝 잠이 들었다가 손님이 왔다는 여관 보이의 말에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다. 상규가 누워 있는 바스트 쇼트에서 트랙 인, 디졸브로 넘어가며 대구를 이루는 그녀의 바스트 쇼트, 다시 디졸브로 넘어가는 상규의 바스트 쇼트에서 트랙 아웃. 여관 앞에 그녀가 와 있다. 둘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들판의 갈대 사이에 자리 잡는다. 상규는 우리 사이에 불순이라 건 있을 순 없다며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순결하다고 하며 그녀를 안는다. 하지만 이 여사는 끝내 뿌리친다. 다시 여관 보이가 부르는 목소리로 시작되는 쇼트. 눈을 뜨는 상규를 거꾸로 잡은 과격한 앵글의 클로즈 쇼트다. 보이는 누가 와서 편지를 주고 갔다고 말한다. 상규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어보니 이상하게도 보이는 “처녀예요.”라고 대답한다. 날이 밝고 똑같은 앵글의 여관 앞, 이 여사는 없다. 꿈이었고, 섹스도 없었다.

두 번째 꿈

마음의 병으로 상규는 몸져눕는다. 기차역으로 가기 전 이 여사는 상규의 집으로 찾아간다. “상규 씨가 대단하시다면서요.”라고 입을 떼자 상규의 누이는 정말로 사랑한다면 나타나지 말라고 설득한다. 이 여사는 ‘외로워서’ 재가할 것이고 시골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둘의 미디엄 쇼트로 진행되던 쇼트가 살짝 앵글을 바꾼다. 둘을 확대한 니(무릎 위) 쇼트. 이 여사가 다시 묻는다. “상규 씨가 대단하세요.” “응. 조금 전에 잠들었어. 들어가.” 누이는 자리를 피해주고, 이 여사는 잠든 상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음의 목소리로 “진실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바로 이어지는 쇼트는 잠자리에서 괴로워하는 상규의 바스트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카메라도 틸트한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건 이 여사가 아니라 그의 누이다. 상규가 누가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누이는 “누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말한다. “꿈이었군요.”

영화의 마지막은, 역사의 울타리 밖에서 안타깝게 이 여사를 바라보는 상규의 병든 얼굴이다. 영화 초반 부산에 내려가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역사 밖에서 바라보던 이 여사의 얼굴과 대구를 이루는 이 장면은, 전후 한 남성의 불순하면서도 순결한 사랑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린다. 그건 꿈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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