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배우, 일견 유사해 보이면서도 층위가 다른 두 단어. ‘스타’가 문화적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전달하는 일종의 기호, 즉 텍스트 외부의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라면, ‘배우’란 마릴린 먼로의 말처럼 가장 예민한 장치, 즉 텍스트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스타는 될 수 있으나 훌륭한 배우로는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 그 반대로 훌륭한 배우이지만 스타는 아닌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목격해왔다. 하지만 여기, 스타와 배우, 두 수식어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9월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은 스타이자 배우, 이정재 특별전을 준비했다. 이제 막 마흔을 넘긴 배우의 행보를 조명하는 일이 자칫 이른 것이 아닌지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1994년 <젊은 남자>로 데뷔해 곧 <관상>(한재림, 2013) 개봉을 앞둔 이 배우가 벌써 연기 데뷔 20년을 맞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놀람’은 두 가지 배경에서 연유한다. ‘젊음’의 상징으로 불리던 그가 벌써 데뷔 20년을 맞았다는 사실과 조용히, 하지만 늘 과감하고 도전적인 시도로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그의 행보 때문이다.
1994년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로 데뷔한 이정재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영평상 등 그해 영화 시상식의 신인상을 거의 휩쓸었을 정도로 말 그대로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스타였다. 스타란 당대 사회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말처럼 금융위기 직전 소비자본주의가 팽배했던 1990년대 사회의 들끓는 욕망과 불안을 이정재는 톱모델을 꿈꾸며 성공을 향해 질주하지만 결국 수렁에 빠지고 마는 이한을 통해 체현했다. 자신의 욕망을 단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반항적인 젊음의 이미지는 <불새>(김영빈, 1997)의 영후로, <태양은 없다>(김성수, 1998)의 홍기로 더욱 강력히 관객들의 뇌리에 박히면서 그는 정우성과 함께 1990년대 청춘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반면 배우로서의 그의 행보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그것, 즉 스타성에 기대고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스타 이정재가 아닌 배우 이정재의 길을 차분히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젊은 남자>에 이어 한국영화계의 거장 배창호 감독과는 <흑수선>(2001)으로 다시 만났으며, <태양은 없다>의 호평과 흥행 이후 차기작으로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1999)을 선택했다. 비록 흥행은 참패했으나 세련되고 모던한 이미지의 그가 검댕칠을 하고 천민 이재수로 분한 모습은 낯설지만 스타의 껍질을 벗고 배우로 발돋움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과감한 시도는 신인 감독들과의 작업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단편영화계의 기대주였지만 장편영화 감독으로는 검증되지 않았던 이재용 감독의 데뷔작 <정사>(1998)에서 그는 예비 처형과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우인을 맡아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감수성을 표현할 줄 아는 섬세한 배우임을 증명했다. 또한 변혁 감독의 데뷔작 <인터뷰>(2000)에서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다큐멘터리 작가 은석으로, 이제는 1,000만 흥행 감독이 된 김용화 감독의 데뷔작 <오! 브라더스>(2003)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이용하려 하지만 결국 서로를 감싸 안게 되는 따뜻한 형, 오상우를 능청스러울 정도로 코믹하게 소화해냈다.
그 외에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렬한 남성미로 표출한 <태풍>(곽경택, 2005)의 강세종과 자본주의 그 자체를 체현한 <하녀>(임상수, 2010)의 훈, 서로를 속고 속이며 자신의 욕망과 허세를 채우려는 <도둑들>(최동훈, 2012)의 뽀빠이, 그리고 최근작인 <신세계>(박훈정, 2012)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스템에 복속된 채 결국 괴물로 변하는 이자성까지.
이번 ‘이정재 특별전’에서는 그의 데뷔작인 <젊은 남자>부터 최근작 <신세계>까지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변화무쌍한 캐릭터를 그만의 섬세한 감수성과 세련됨으로 세공해온 스타이자 배우, 이정재의 20년 영화 행보를 함께 되돌아보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