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에 한국영화가, 그것도 기록영화가 아닌 극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 역시 2000년대 초 우연히 할머니로부터, “동란 중에 대구 피난민들이 땟거리(끼니)는 없어도 극장 구경은 빼놓지 않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한국전쟁기의 한국영화 제작과 상영 문화’에 대한 석사 논문작업에 착수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2002년 여름 석사 논문을 마무리할 때쯤, 이른바 ‘동란기’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바로 지역 영화사의 복원 가능성,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 성장기의 기반으로서 역사적 의미부여로서 말이다.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한국영화사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가고 있을 때, 한 외화 배급사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전해 들었다. 친구가 거래하는 대구의 한 지방 배급업자가 말하길, 대구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는 민병진 씨의 선친이 예전 대구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계간 영화언어>의 한국영화사 섹션에 참가하고 있던 필자는, 그와의 인터뷰를 지면에 게재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고, 바로 그의 부친이 필자가 석사 논문에서 다룬 <태양의 거리>(1952)의 민경식 감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경식 감독이 만든 <태양의 거리>의 16밀리 필름을 가족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듣게 된다.
어린이들의 눈에 비친 전쟁과 가난
당시 일간지 영화평에 의하면 <태양의 거리>는 “당시 피난민으로 들끓던 대구를 배경으로 불량소년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묘사”하며 “피난 생활 가운데 피어나는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우정과 생활고 때문에 악의 길을 밟게 되는 돌이 형(전택이)의 생활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이 간단한 줄거리만 봐도,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이탈리아 영화 사조 ‘네오리얼리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영화평도 <태양의 거리>를, 그즈음 개봉했던 이탈리아영화 <자전거도둑>(1948), <무방비도시>(1945)나,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조선/한국영화 <집없는 천사>(1941),<마음의 고향>(1949) 등과 비교하며, ‘코리안 리얼리즘’을 시도한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H생, 「영화평 <태양의 거리>」, <대구 매일신문> 1952년 10월 17일자). 이처럼, 이영일이 <한국영화전사>에서 ‘리얼리즘’의 관점으로 한국영화사를 구성한 것은, 한국전쟁기를 포함해 1950년대의 한국영화 비평계에서 발신했던 ‘코리안 리얼리즘’ 담론(‘특집: 코리안 대 이타리안리즘의 비교’, <영화세계>1957년 2월호 참조)에 빚진 것일 수도 있겠다. <태양의 거리>에 등장하는, 무직의 불량 청년인 장남,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차남, 접대부를 나가는 딸, 병상에서 신음하는 노모(노재신) 등 서울에서 내려와 피난 생활을 하는 가족 구성원만 보더라도, 이영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한국영화사가 왜 <오발탄>(유현목, 1961)으로 귀착되는지 그 맥락을 새겨볼 수 있다.
또한 ‘후기 식민(post-colonial)’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일본영화의 영향을 받았던 식민지 조선영화 스타일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도 흥미로울 거라 생각한다. 한창 전쟁 중인 1952년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를 비롯해 <태양의 거리> <베일부인> 등 7편의 극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한국전쟁기 극영화 목록 참조)도 놀랍지만, 그 영화들이 ‘코리안 리얼리즘’으로 묶여 비평되었다는 점은 당대 사회문화의 반영으로서의 영화 매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만든다. 전쟁은 의외로 38도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고, 덕분에 후방의 피난 도시는 직접적인 전쟁에서 벗어나 극영화 제작 환경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마치 네오리얼리즘처럼 전쟁 속의 사회와 인간들을 필름 속의 드라마에 담아내는 성찰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정전 후 영화인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대구에서 한동안 극영화 제작이 이루어졌음은 지역 영화사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일 것이다. 정전 전에 착수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 대구 자유극장 제작, 민경식 연출의 2회작 <구원의 애정>(1955), 윤예담 감독의 <산적의 딸>(1957), 도금봉의 데뷔작인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1957) 등이 대구 자본과 인력을 포함해, 대구 등지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후 민경식은 총 5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지만, 다시 대구 지역 극장가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로 돌아갔다. 이즈음 한국영화 제작이 국가 주도의 영화사 정비로, 서울 중심으로 굳어진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더 이상 연출에 참가하지 못한 맥락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영화] 태양의 거리
자유영화사 제1회 작품. 이 작품은 피난민 소년과 원주민 소년 사이에 흔히 있는 질투와 싸움이 신임된 선생에 의하여 해제되고 소년 간의 우정은 범죄행위까지 하면서 피난 소년의 가정의 곤경을 돕게 하고 선생이 피난 소년의 형과의 동창이라는 데서 그의 가정을 돕고 소년이 다시 등교하게 된다는 소년의 세계를 그려서 어른들의 세계에까지 발전시켜보려는 스토리와 의도를 가진 작품인데 시나리오(김소동)의 내용이 빈곤인가 소년 심리를 깊이 파고들어가지 못하고 피부에만 터치한 감을 준다. 원주민 소년들이 자기 부모에게 호소한다든가 소년들끼리 모여 합의한다는 자발적 의도로 이끌어가지 않고 범죄 행위와 직결시킨 데 이 작품의 치명적 결함이 있다. 피난 소년 돌이(김박길)에게 그 이상의 연기는 기대할 수 없다 해도 그의 누이 복희(김혜영)의 무감각한 연기와 선생 문대식(박암)의 표정의 부자연성은 대중에의 어필을 반감했으며 이형사(강계식)의 기계적 동작은 어색감을 불금(不禁)케 한다. 하여간 교육적인 견지에서도 학생들에게 보이고 싶은 영화이다. (상영시간 1시간 10분, 박성환) /경향신문 1952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