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신상옥 감독이 신필름을 설립한 전후, 그와 격동의 영화사를 함께했던 관련 회사들을 정리해보았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형태에 가까웠던 신필름과 신상옥,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관련 영화 기업들은 저마다 한국영화사에 결정적 방점을 찍고 있다.
영화예술협회, 혹은 영상예술협회 (1952~1954)
신상옥의 첫 두 작품인 <악야>와 <코리아>에서만 쓰였다. <악야>에서는 영상예술협회, <코리아>에서는 영화예술협회라는 명칭이 각각 사용되었다.
신상옥푸로덕 (1955~1961)
1955년 개봉한 <젊은 그들>에서 <성춘향>, 그리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상호다. 신상옥푸로덕은 거의 항상 서울영화사와 함께 표기되었다.
서울영화사 (1955~1962)
신상옥의 증언에 따르면 초기 변순제 등과 함께 만든 영화사이나, 1950년대 후반 이후 신상옥 영화사의 배급을 전담하는 회사로 활용되었다.
신필림 (1961~1970)
<성춘향>의 흥행 성공을 바탕으로 원효로 촬영소를 인수한 후 사용된 명칭이다. 1961년 9월 문교부 고시 148호에 따라 영화사가 통합될 때, 신필림이라는 이름으로 단독 등록했다. 1970년 원효로 촬영소의 폐쇄로 인한 시설 미비로 문을 닫을 때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안양필림 (1967~1968)
1967년 안양촬영소의 스튜디오를 활용해 등록한 방계회사다. 1966년 영화법 개정 이후 1967년 신규 등록했다. 대표는 이수길이 맡았다. 1968년까지 1년 남짓 운영되며 총 2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덕흥영화사 (1967)
1967년 안양촬영소의 스튜디오를 활용해 안양과 함께 만든 일종의 자회사 중 하나였다. 지우성이 대표를 맡았다. 1967년 말 공보부의 영화사 통합 조치로 인해 안양필림으로 통합되었다.
안양영화 제작주식회사 (1970~1973)
1970년 신필림이 원효로 촬영소의 폐쇄와 함께 자격요건 미달로 등록 취소를 당하자, 안양촬영소의 시설 및 장비로 새롭게 등록한 회사명이다.
신프로덕션 (1973~1975)
1973년 2월의 4차 영화법 개정 후 제작사의 신규 허가 신청 시에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명칭을 개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허가 일자는 1973년 3월 31일이었다. 회장은 신상옥, 대표이사는 신태선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