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는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을 리모델링하느라 지난해부터 크레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체육관 길 건너에 그 옛날 최은희 씨가 살고 있었다. 정원이 넓고 손질이 잘되어 햇빛에 반짝이는 정원수와 꽃들이 하늘거리고, 2층 양옥에는 30대의 최은희 씨와 신상옥 감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름은 옥이였다. 거기서 10분쯤 걸으면 시구문이 있고 우리 집은 새로 지은 한옥이었다. 어느 날 그들이 강아지를 안고 찾아왔는데 후에 알고 보니 <로맨스 그레이>(1963)의 헌팅이었다.
골목 안은 구경꾼들로 가득했고 우리가 기르는 송아지만 한 포인터는 작은 옥이를 보고 후각을 곤두세웠다. 옥이도 킹킹거리며 큰 개에게 호응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신 감독은 나에게 그가 기르고 있던 개를 내 개와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몇 년 전 <돌아온 사나이>(1960)로 그들과 같이 일을 했고,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영화계 왕의 제안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최은희 씨는 옥이를 다른 개와 교환하는 일에 반대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갈 때 신 감독은 우리 집 개를 끌고 갔고 옥이는 반들거리는 우리 집 마루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우리는 이렇게 개사돈이 되었다. 그 후의 50년은 그들도 나도 영화라는 회초리로 매를 맞으며 살아야 했다. 어느 해인가 부산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최은희 씨의 납북 소식을 듣고 밥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후 신 감독도 북으로 가 내 가슴엔 황량한 바람이 불 때가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녹음실 복도에서 두 어린이를 만나 그때는 재회조차 꿈꾸지 못했던 두 사람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지금 아들은 미국에서 경찰이 되었고, 딸은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최은희 씨에게 들었다.
최은희 씨는 지금 중년이 된 또 다른 아들과 딸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어려서 입양한 그들은 잘 자라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얼마 전 최은희 씨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그 옛날 같이 일하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우 천선녀, 고은정, 신영균, 임권택, 김동호 씨가 그들이다.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를 이끌어가는 신필름의 대표는 아무래도 최은희 씨고 이장호 감독 등이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우아하고 총명한 최 여사는 지금도 옆에 앉으면 내 마음이 두근거리지만 약간 외로워 보일 때가 있다. “신 감독을 만나고 싶나?” 하고 물으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은희 씨에게는 당대를 대표했던 여배우의 향기가 여전히 넘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