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전성기 이끈 집념의 영화인 신상옥, 최은희 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의 바이오그래피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3-05-14조회 2,137
신상옥 최은희

신상옥은 예술적 안목과 대중 친화적 감각을 겸비한 집념의 전천후 영화인이다. 그는 미술, 촬영, 편집 등 영화기술에 대한 식견이 뛰어날 뿐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 한국 영화산업사를 논할 때 신상옥과 그가 이끈 신필름을 빼놓을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특히 그가 신필름을 이끌며 이룩한 1960년대의 성과는 곧 한국영화 전성기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에 그가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1961), <열녀문>(1962),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 (1964), <내시>(1968)와 같이 완성도 높은 영화를 내놓지 않았다면 뒷날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기영, 유현목과 이만희, 김수용, 이성구 등이 각개약진하며 받쳐준 1960년대의 영화에서 제작자, 또는 감독으로서 신상옥이 수행한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인들과 그 시대의 사회 상황, 그리고 대중이 함께 만들어내는 총체적 작품이다. 더욱 중대한 오류는 영화를 감독 ‘개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평가하는 경향이다. 영화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결코 개인의 작품일 수가 없다.”

신상옥은 자서전 <난 영화였다>(2007,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영화는 프로듀서, 시나리오작가, 배우, 카메라맨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만든 종합예술이면서 원초적으로 기술적인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의 집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편협한 프랑스식 작가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자서전 16쪽). 그는 이런 인식 아래 자신을 ‘할리우드적 성향’의 감독이자 제작자로 규정하고, 표현은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분명히 할리우드적이었다고 토로하였다. 그가 고수해온 영화관을 잘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그의 영화 인생에 크게 작용하였다.

나운규 영화에 감화 받은 한약방 집 아들

신상옥은 1926년 9월12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한의사인 신병용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태서(申泰瑞)이다. 집 앞에는 소화좌(昭和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청진에 있는 서너 개 가운데 하나인 재개봉관이었다. 그는 천마보통학교 다닐 때부터 한 번에 두세편씩 동시 상영하는 이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본 것도 이때였다. 이 무렵에 본 영화 가운데는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동도(東道)>(1920),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1925), <모던 타임즈>(1936)와 같은 서양영화도 있었다.

그 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그가 좋아한 것은 나운규의 영화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1937)만 빼고는 거의 다 볼 정도였다. 그중에도 특히 개와 고양이가 싸우는 <아리랑>의 상징적인 첫 장면과 불타는 장면을 붉은색 전체 화면으로 처리한 <벙어리 삼룡>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영화들은 뒷날 신상옥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청진 천마소학교를 졸업하고 두만강변에 있는 함경도 명문인 경성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계속 영화에 빠져들었다. 모범생은 되지 못했으나 영화 관람과 그림 그리기, 독서, 음악에 열중하였다. 당시 경성중학교에는 문단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인 김기림이 국어교사로 있었다. 월남 후 시인이 된 김규동과 만화가 신동헌, 사회당 대표를 지낸 정치가 김철 등이 그때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선전(鮮展)에 입선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학도병을 뽑느라고 중학교가 5년에서 4년제로 줄어든 일제 말기, 신상옥은 4학년 졸업도 못한 채 일본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천성이 자유분방하고 고집이 센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에 심취했다. 그런 한편 여전히 영화관을 드나들었다. 일본영화도 많이 봤지만 정작 매력을 느낀 것은 마르셀 카르네나 줄리앙 뒤비비에의 프랑스영화였다.

그는 광복 4개월 전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당장 먹고살기 위해 포스터를 그렸다. 인쇄 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일감이 자주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영화 포스터도 그리게 되었다. 이 무렵 마침 형(신태선)이 근무하는 토건회사 사장의 소개로 <자유만세> (1946)의 최인규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지시로 세트를 만드는 일을 돕고 스틸사진도 찍었다.

최인규 감독의 기계에 대한 집착은 유별날 정도였다. 편집할 때 필름에 자문이 묻는다며 병원에 가서 손의 땀선을 제거해버리는가 하면, 미공보원의 의뢰로 홍보영화 <국민투표> (1948)를 만들 때는 반환을 요구하는데도 미첼카메라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구조를 완전히 파악한 뒤에야 돌려주었다. 당시로는 우리나라에 단 한 대뿐인 동시녹음 카메라였다.

신상옥은 이렇게 영화계 초년생 시절부터 최인규 감독으로부터 영화의 기초를 익히고 기재와 기술의 중요성을 배웠다. 이때 습득한 경험이 장차 그의 영화 활동에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낮에 밤 장면을 찍는 <연산군>(1961)의 데이포 나이트(Day for Night) 촬영기법이며, <로맨스 그레이>(1963)의 줌 렌즈 사용, <벙어리 삼룡>의 망원렌즈와 <빨간 마후라> (1964)의 공중 촬영 및 열 배 줌 렌즈의 활용 등이 이미 그런 과정에서 터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운규에게서 영화의 근본과 작가정신을 배웠다면, 최인규 감독으로부터는 영화제작의 핵심적 기술들을 익혔다고 할 수 있다.

<악야> 이후 만개한 신상옥 시대

신상옥은 1952년 6・25 전쟁으로 시련을 겪는 가운데 피난지인 항도 부산에서 <악야(惡夜)>를 탄생시켰다. 양공주 문제를 다룬 김광주 원작의 작품으로 만 26세의 나이에 영화계에 첫발을 디디는 감격적인 신고식이었다. 집에서 제작비를 지원받아 촬영에 들어갔으나 졸지에 전쟁을 만나 필름을 싸들고 대구로 내려와 어렵게 만들어 부산에서 개봉한 16밀리 영화였다. 여기에는 친구인 황남과 이민자, 문정숙이 출연하였다. 문정숙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필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은 드라마적 기복이 거의 없이 사실적인 정황 묘사로 일관하며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편집과 카메라 워킹 위주로 영상미에 주력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악야>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해외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코리아>(1954)이다. 신라시대의 석가탑 등의 문화재와 명승지에 곁들여 처용의 노래, 무영탑에 얽힌 사연, <춘향전> 등의 이야기를 삽입한 이색적인 다큐멘터리다.

잇따라 이광수 원작 <꿈>과 김동인의 <젊은 그들>(1955), 현진건의 <무영탑>(1957) 등 문예작품, 그리고 <악야> 계열의 <지옥화>를 비롯한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동심초>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로맨스 빠빠> <이생명 다하도록>(1960),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1961), <강화도령>(1963), <빨간 마후라>(1964), <다정불심> <이조잔영>(1967), <대원군> <내시>(1968), <이조여인 잔혹사>(1969) 등을 내놓았다. 여세를 몰아 <이조괴담>(1970), <전쟁과 인간>(1971), <효녀 청이>(1972), <이별>(1973), <13세 소년>(1974), <아이러브 마마> <장미와 들개>(1975)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1970년대를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신상옥은 북한에서 메가폰을 잡은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사랑 내 사랑> <탈출기>(1984), <소금>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1985) 등 7편을 제외하더라도 반세기가 넘는 영화 생애를 통해 모두 68편의 감독 작품을 남겼다. 곧 1950년대 12편, 60년대 34편, 70년대 18편, 그리고 탈북 후의 <마유미>(1990), <증발>(1994), <닌자 키드 3>(1995), <겨울 이야기>(2004) 등 4편이 그것이다.

이울러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 밑>(1961), <아름다운 수의>(1962)와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1965), <돌지 않는 풍차>(이봉래, 1967), <포상금>(이경태, 1971) 등 150여 편을 제작하였다.

데뷔 초기에는 <악야> <지옥화> 등에 나타나듯이 사회성이 강한 리얼리즘을 추구했으나 <꿈>을 계기로 <무영탑> 등 차츰 탐미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몇 년 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1961), <벙어리 삼룡>(1964) 등 현실도피적인 문예영화로 이어지면서 한결 안정된 영상미를 선보였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망가진 1960~70년대 군사정부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여건 아래서 그는 멜로드라마, 사극, 액션드라마, 괴기물, 전쟁영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활로를 모색하였다.

신필름의 빛과 그림자

신상옥은 스케일이 큰 사람이었다. 1960년대 초입에 히트작 <성춘향>(1961)으로 올 캐스트에 의한 시네마스코프 색채영화 시대를 여는가 하면, 2만 5000평 규모의 안양영화촬영소를 인수해 운영하였다. 이 촬영소를 중심으로 산하에 10여 명의 감독을 두고 1년에 스물여덟 편까지 제작하며 영화산업화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영화의 규모로 볼 때 이 시설은 너무 큰 것이었다.

신상옥은 60년대를 정점으로 70년대 초반을 넘어서며 <반혼녀>(1973), <여수 407호>(1976) 등 범작과 함께 작가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침체 현상을 면치 못했다. 그가 제작을 겸한 감독이 아니었다면 극복했을지 모를 불안한 신호였다. 홍콩과의 합작영화 <장미와 들개>(1975)의 예고편으로 인한 이른바 ‘검열 위반 사건’은 이런 시기에 터진 충격이었다. 3초가량의 필름이 20여 년의 신필름 역사를 벼랑으로 내몰고만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신상옥은 생명의 동아줄 같은 영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영화를 계속 만들었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된 이후에는 북한에서, 1986년 탈북한 뒤에는 미국에서 ‘납북’이 아닌 ‘월북’이라는 일부의 누명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된 나라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재능 많은 경계인, 그러나 그의 인생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손창섭의 소설 제목처럼 ‘미해결의 장’으로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팔순에 이른 말년에도 마지막 역작이 될 수 있었던 숙원의 영화 <칭기즈칸>의 한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은희, 그 영광과 시련의 연대기

영화배우 최은희는 분단 한국의 최대 희생자이자 황금기 한국영화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영화계의 샛별로 떠올라 한국의 대표적인 스타로 한 시대를 누볐으나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질곡의 삶을 지탱해나가야 했다. 그녀의 기구한 삶은 자신이 연기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6・25 전쟁 중에 겪은 ‘부역’의 악몽, 육체의 수모, 그리고 두 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 두 차례의 납북과 탈출 등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마디로 최은희의 인생은 명암이 엇갈리는 영광과 시련의 세월이었다.

의상 심부름꾼에서 연극 무대로 오르다

본명이 경순인 최은희는 1926년 11월 9일 남한산성 맞은편의 두메마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영환은 구한말의 군인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서울로 이사한 후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부학교처럼 교양을 가르치는 경성기예(技藝)학교를 다녔으나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에 그만두었다.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 26쪽, 랜덤하우스, 2007)

이 무렵 방공 연습을 나갔다가 알게 된 연극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 월북)의 소개로 마침 <칭기즈칸>을 준비 중인 극단 ‘아랑’의 의상작업을 거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경험이라곤 학교 다닐 때 연극무대에 선 것이 전부였지만 연구생이 된 지 한 달 만에 찾아온 기회였다. 대구 공연 때였는데, 문정복이 한번 해보라며 무대로 올려 세운 것이다. 비록 하녀라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극의 반전을 돕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날 공연한 작품은 신파극 <청춘극장>(임선규 작)이라는 극단 ‘아랑’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이렇게 연극무대에 데뷔한 최은희는 <칭기즈칸>(안영일 연출)의 시녀 역에 이어 모처럼 <물새>(양백명 연출)의 주연을 맡는 기회를 얻었으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선배 연극인들의 조언에 따라 일본어로 번역된 스타니슬스랍키의 <배우 수업>을 읽으며, 연기의 기초를 익히고 꾸준히 연극을 했다. 아버지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영화에 각인시킨 단아한 한국 여인의 이미지

광복이 되자 ‘경순(慶順)’이라는 본명 대신 아버지가 지어준 ‘은희(銀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광복 전 해체되었다가 부활한 토월회의 연극 <40년>의 꽃 파는 장님 역이 그 출발점이었다. 뒤이어 극예술협의회의 <맹진사댁 경사>(오영진 작) 등 여러 편에 출연했다. 어느새 극단의 선배인 복혜숙, 김소영 등과 어깨를 겨루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그녀에게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일본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라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였다. 원래 제목이 ‘노도(怒濤)’인 이 영화는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나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인 어촌에 돌아온 세 청년이 마을 처녀들과 힘을 모아 폐습을 타파하고 황폐한 어촌을 재건한다는 일종의 계몽영화였다. 그에게 부잣집 외동딸 역이 돌아왔다. 공연자는 독은기, 최운봉, 김연실 등이었다.

최은희는 이때 알게 된 열세 살 연상의 촬영기사 김학성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게 된다. <밤의 태양>(박기채, 1948)에 출연한 이듬해였다. 김학성은 광복 전 방한준 감독의 <성황당>(1939)을 찍은 일본 유학생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 김연실의 남동생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혼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살다가 6년 만에 헤어지고 만다.

이후 동승(童僧)의 애절한 사모곡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의 젊은 미망인으로 출연해 청순하고 단아한 한국 여인의 이미지를 각인시킴으로써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게 한다. 이 계열에 속하는 출연작으로 <촌색씨>(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열녀문>(1962), <벙어리 삼룡> (1964), <민며느리>(1965) 등을 꼽을 수 있다. <촌색씨> (박영환)와 <민며느리>(최은희, 1972)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상옥 감독 작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쪽찐 머리에 안으로 한을 삭이며 살아가는 여성이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인고(忍苦)하는 모습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코리아>(1954)는 최은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선배의 아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한 신상옥과 호흡을 맞춘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들은 혼례를 갖춘 부부 사이가 되었다. 신 감독은 이 영화에 집어넣은 <춘향전> 장면에 그녀를 출연시킴으로써 장차 ‘신필름의 안방마님’ 시대를 예고했다.

잇따라 <꿈>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어느 여대생의 고백> <지옥화>(1958), <동심초>(1959), <이 생명 다 하도록>(1960), <상록수> <성춘향>(1961), <로맨스 그레이> (1964), <빨간 마후라>(1964), <날개부인> <청일 전쟁과 여걸 민비>(1965), <다정불심>(1967), <저 눈밭에 사슴이>(1969) 등에 출연하며 그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가운데는 앞에 언급한 순종형의 인물과 상반된 능동적인 여성의 캐릭터를 부각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바로 어버이를 잃고 복수에 나서는 <젊은 그들>의 남장 처녀(인화), <지옥화>의 양공주, 파마머리에 껌을 질겅질겅 씹는 <로맨스그레이>의 활달한 현대여성(민자), <날개부인>(김수용)의 치맛바람 아줌마, <저 눈밭에 사슴이>(정소영, 1969)의 복부인 역과 같은 생활 밀착형 여인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주로 신필름의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지만 회사의 운영을 돕기 위해 다른 제작사의 영화에도 출현했다. 그의 출연작 118편 가운데 30여 편을 제외하고는 자회사 작품이었다. 그는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북된 1978년 이전인 1976년까지는 1971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최소 1편, 많을 때는 14편(1964)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1975년 오수미를 주연으로 기용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검열 위반’ 사건으로 신필름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신 감독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1976년 여름 신상옥과 23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이 부진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1978년 1월 22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고 만다. 이런 사태 아래서 1983년 3월 7일 김정일이 초대한 연회장에 갔다가 신상옥과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운명적인 재결합의 길을 선택한 그들은 북한에서 <탈출기>(1984), <소금>(1985) 등 10여 편을 만든 뒤 19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단행한다. 10년이 넘는 미국 망명생활 끝에 1999년 영구 귀국하였다.

그녀는 연기 외에도 <민며느리>(1965)를 비롯한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 세 편의 감독 작품을 남겼다. 최은희는 자신의 표현대로 ‘영화에 미친 야생마’ 신상옥의 아내이기 전에 동지로서 반세기 이상 영화를 위해 끈질기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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