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감독 김동현(<상어><처음 만난 사람들>)의 주선을 통해서였다. 수년 전 김동현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희한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 내가 보기엔 천재 같다”며 DVD 한 장을 건넸다. 그 영화는 오멸의 데뷔작 <어이그 저 귓것>(2009)이었다. 과연 그것은 기성의 영화 작법이나 언어를 완연히 비껴나 있는 스토리와 캐릭터, 리듬으로 일관하는 해괴한 영화였다. 대번에 그런 물건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어이그 저 귓것>에 이은 후속작 <뽕똘>(2009)까지만 해도 오멸은 정형화된 영화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일상의 공백을 특유의 영화적 리듬으로 형상화해내는 희귀종 정도로 취급되었다. 제주도 사람들의 공동체 문화와 습속, 기질을 일관되게 다루었던 오멸의 세계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어도>(2011)에서부터였다. 섬사람 특유의 삶에 대한 해탈의 시선과 낙천성을 근간으로 했던 제주도의 토박이 감독은 숨겨둔 비기를 꺼내 보이듯 제주도의 정체성과 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어도>와 근작 <지슬>(2012)은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중 하나인 제주도4・3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두 편의 역작에서 드러나는 오멸의 야심은 대단하다. 특별히 그것이 흥미를 자아내는 이유는 연극, 사진, 미술, 음악 등 예술 형식의 총화를 목표로 오랜 시간을 단련해온 그의 기질의 폭주의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어도>는 흑백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아픈 역사를 영상시로 번안해낸다. 선댄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쥐며 국제 무대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 <지슬>은 양식화된 플롯, 섬세한 이미지 연출을 통해 최상급의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지슬>에서 오멸이 보여준 연출력은 앞선 영화들의 허허실실 스타일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가 한국이나 제주도라는 로컬 시네마의 한계를 돌파해 국제적인 시네 아스트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영화 언어를 다루는 남다른 자질에서 찾을 수 있다. 무지렁이에 가까운 인물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면서 이미지의 세공을 거의 도외시하다시피 한 전작들에 비해 <지슬>은 고도의 형식미로 충격을 안겼다. <지슬>의 플롯과 스타일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사자(死者)의 넋을 위무하는 제사의 네 단계를 소제목으로 단 이야기 단락과 과일을 깎고, 절을 하고, 연기를 피우는 제의적 행위들, 관행화된 쇼트 구성을 거절하되 의미와 주제를 꿰뚫는 정교한 장면 연출은 절창의 수준을 보여준다. 오멸은 로컬 아이덴티티를 통해 탈국가, 탈경계의 보편언어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감독이다. <이어도><지슬>로 이행하는 궤적으로 보건대 오멸의 영화는 로컬 영화에 머무르지 않고, 한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을 이해하는 민족지 영화의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그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와 생활방식을 뛰어넘어 그들의 정신 세계를 구현한 시네마의 형태에 근접해 있다.
필자 추천작 <뽕똘>(2009), <어이그, 저 귓것>(2009),<지슬>(2009)
오멸의 데뷔작 <어이그, 저 귓것>은 ‘귀신이 데려갈 바보 같은 놈’이라는 의미다. 한갓진 제주도 마을 청년들의 하릴없는 일상을 심드렁한 유머와 음악의 조화로 풀어내는 이 영화는 민요와 포크 음악을 테마로 한 음악영화이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 <뽕똘>은 낚싯바늘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낚싯줄 끝에 매어다는 쇳돌을 의미한다. 제주도의 설화를 영화화하려는 감독 뽕똘의 제작기를 소동극 형식으로 다룬 이 영화는 ‘어디에도 소용될 것이 없는 하찮은 일들이 모여 예술이 된다’는 오멸의 신념이 구체화된 작품이다. ‘감자’를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을 제목으로 한 <지슬>은 소개령이 내려진 뒤 토벌대에 쫓긴 제주 주인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시로 형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