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먼저 정재훈을 방어하고 싶다. 처음 본 영화는 <호수길>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영화다. 내가 본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소재에서만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었다. 종종 자기가 대상으로 삼은 인물에게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고, 때로 영화라기보다는 미디어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물론 그 영화들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은 자기의 전선에서 한 줌의 정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전선의 문제이지 거기서 영화와 세상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어떤 결정, 종종 미학적이라고 오해하는 윤리적 성찰의 질문 앞에서 나는 배움을 얻지 못했다.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 2동의 골목길 이름이다. 아마 아주 오래전에는 호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는 호수가 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평화로운 골목 동네가 나오고 아이들이 뛰노는 시간이 펼쳐진다. 이따금 우리를 긴장시키는 소리들. 그러나 잠시 후 이 동네는 계절이 바뀌자 유령들이 사는 거리처럼 텅 빈다.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이 커다란 동네에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다. 포클레인이 등장하고 그들은 무자비하게 집을 때려 부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수길>에는 (이런 소재의 영화에서 종종 마주치는) 어떤 시위도 없고, 어떤 가족의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으며,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 정재훈은 사라져가는 집의 시간, 동네의 시간, 골목의 시간, 응암 2동의 시간을 거의 멈춘 듯이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음미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 정재훈이 이 문제를 관념적으로 다룬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영화보다도 <호수길>은 유물론적인 영화다. 이를테면 완전히 쑥밭이 되어버린 응암 2동에 남아 있는 단 한 채의 이층집을 포클레인이 7분 20초 동안 간단하게 때려 부수는 순간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는 장면. 그때 이 집이 누군가가 평생에 걸친 삶의 소금을 바친 대가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부서져가는 한 남자의 육신에 관한 거의 숨 쉬면서 보기 힘들 만큼 끔찍한 <환호성>을 찍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어느 중간.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전 세계에서 300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아직 제목이 결정되지 않은, 그의 말을 빌리면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세 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필자 추천작
<환호성>(2011)
달동네에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잠을 자는데 배에서 자꾸 소리가 난다. 굶었기 때문에 몸이 밥을 달라는 소리다. 무더운 여름, 이 남자는 당구장에서 일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고 그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일을 한다. 자꾸만 땀이 난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나뭇잎이 요란했던 숲은 어느새 벌거벗었다. 이 남자는 세차장에서 일한다.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 남의 차를 열심히 닦는다. 그리고 집에서 잠을 잔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는 일터와 집을 필사적으로 오간다. 그는 매일매일 그렇게 몸이 부서져가면서 그렇게 산다. 산다는 것. 갑자기 영화 화면 전체에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