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를 사뭇 진지하게 보기 시작한 시절은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인 것 같다. 당시 교내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학업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지독한 영화광이기도 했던 동아리 담당 지도 선생님께서는 이미지 표현의 유사성에 있어 사진과 영화의 밀접한 관계를 수업 중 자주 강조하시며 종종 사진보다 영화 이야기에 더 몰입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교직을 은퇴하시고 사진관을 운영하고 계신 선생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영화는 –아니나 다를까-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였는데, 개봉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5번 보셨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2년 후, 고3을 앞둔 1998년 2월 겨울방학 끝자락의 주말이었던가? 사진 동아리의 인연으로 당시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선생님께서는 나를 포함한 중학 시절의 사진 동아리 친구들 셋을 서울극장으로 불러내셨다.
그는 이 영화의 네 번째 관람을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셨는데, 당시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수험생은 주말에도 입시학원에 제 한 몸 바쳐야 했던 불쌍한 영혼이었기에 결국 그날 계획했던 단체 관람은 40대 후반의 남자 선생님과 과묵한 18세 남고생 단둘의 조금은 어색한 데이트가 되어버렸다. 관람을 마치고 종각 인근의 포장마차에서 때이른 소주잔을 선생님께 받아 들며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로 영화에 대한 뒷이야기를 제법 늦은 시간까지 진지하게 나누던 기억이 난다. 고(故) 유영길 촬영감독의 별세를 깊은 한숨으로 아쉬워하며 그의 유작에 특별한 애정을 표하던 선생님은 그해 수능이 끝나고 약 1년 만에 동아리 동기들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내게 비닐도 안 뜯은 <8월의 크리스마스> 비디오 테이프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은 결국 내가 소장한 VHS, DVD, 블루레이 등 1500여 편의 영화 컬렉션 중 최초의 소장품이자 열정적인 무비 컬렉터 생활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러 한때 꿈꾸던 사진가와 촬영감독의 길에서 완연히 멀어진 후, 조금은 다른 길이지만 좋은 영화를 최고의 화질과 음질로 질 좋은 그릇에 정성스레 담아내는 -적어도 내게는- 보람된 직업인 블루레이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봄, 열악한 국내의 부가판권 시장 상황에 비추어볼 때 정식 발매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블루레이로 내고 싶다는 출시사의 제작 의뢰를 받았을 때, 지금은 연락을 못 드린 지 5년이 넘은 동아리 선생님을 떠올리며 새삼 추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정적이고 소박한 영상의 매력
블루레이를 제작하면서 어쩌면 극장에서 필름으로 상영할 당시보다 더 좋은 상태의 영상을 HD 디지털 마스터로 수없이 체크하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이 영화의 소박한 진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날로그 시절의 사진을 다루는 영화 속 소재처럼 필름 영화 특유의 진중하고 담백한 매력이 가득한 영상미다. 한석규와 심은하라는 당대의 톱 남녀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전해에 선보여 각종 시상식에서 촬영상을 휩쓴 김형구 촬영감독(그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수제자다)이 카메라를 잡은 <비트>의 현란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가수 김광석의 영정사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지극히 정적인 이미지의 연속이다. 특히 영화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무대이자 다림과 정원이 소파에 기대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진관 내부 장면들은 거의 스틸에 가까운, 즉 정사진(靜寫眞)의 이미지만으로 일관되게 이루어진 쇼트인데, 이뿐 아니라 고작 250컷에 불과한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좀처럼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예술 작품은 작가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듯 허진호 감독의 차분하고 느릿한 말투처럼, 혹은 죽음의 두려움과 슬픔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미소 짓는 영화 속 정원의 마지막 순간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이 추구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정중동의 카메라 미학이 집대성된 걸작이다. 율동에 가까운 <경마장 가는 길>의 유려한 카메라 무빙을 기억하는 이라면 그의 영화 인생을 마감하는 유작이 이와 같은 차분함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간결한 촬영 스타일임에도 영화 속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감정선과 애잔한 멜로영화적 정서가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자신들 커리어의 최고작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한석규, 심은하 두 훌륭한 주연배우의 공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트 촬영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 속 사진관 역시 실제 존재하는(지금은 관광명소가 된) 군산의 작은 사진관을 빌려 찍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인위적 연출의 예술일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거슬러, 피사체와 카메라의 역학관계에 있어 객관성과 사실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촬영 철학에 이 영화는 적잖은 빚을 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정서까지 담아내는 빛의 마술
촬영 미학의 연장선 상에서 이 영화가 또한 뛰어난 점은 극도로 억제된 카메라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정적인 이미지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변화무쌍한 빛의 연출이다. 최대한 자연광 위주로 촬영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되, 밤 장면에 사용된 인공 조명조차 인위적인 색체를 없애는 데 오랜 준비 시간을 들인 이 영화는 배우의 감정선이 변화함에 따라 같은 자연광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도록 세심하게 필름 속에 담겨졌다. 영화 초반, 정원이 오전 일찍 사진관 문을 열 때의 햇빛, 더위에 지쳐 소파에 잠시 기댄 사이 잠들어버린 다림의 얼굴에 비친 느지막한 오후의 햇빛, 홀로 마루에 웅크려 앉아 발톱을 깎는 정원의 등뒤로 어슴푸레 떨어지는 쓸쓸한 햇빛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묻어난다.
레드원이나 알렉사 같은 최신 4K급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을 구시대의 유물로 몰아내는 요즈음, 블루레이 제작을 위해 ‘하드 디스크’로 전달받는 최신 한국영화들의 디지털 마스터는 그야말로 칼날같이 또렷한 윤곽선과 유리처럼 깨끗한 투명도의 고화질을 자랑한다. 블루레이를 구매하는 소비자들도 이런 쨍한 성향의 화질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조금 떨어지는 해상력에도 불구하고 필름 영화 특유의 입자감이 느껴지는 그레인(Grain)과 부드러운 색감이 어우러져 묘한 화학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이미지들은 디지털 기술이 영화 제작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대에도 여전히 소박하지만 진중한 감동을 준다.
문득 이 글을 마감하고 설 연휴를 지내고 나면 오랜만에 동아리 선생님을 찾아뵈어야겠다는 계획이 섰다. 이번엔 내가 직접 만든 <8월의 크리스마스> 블루레이를 선물로 들고서 말이다.